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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15.스쿨서점의 추억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15. 15. 스쿨서점의 추억 내 고향 영주 그중에서도 잊지 못할 추억의 한 페이지에 곱게 접힌 채 남아있는 영주 스쿨서점...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 1954년 문을 열었다는 3대를 이어오는 노포서점 이라고 나오네 오래된 내 기억 속의 스쿨서점은 옛 영주극장과 옛 조흥은행 양쪽에 큰길을 두고 삼각형 섬처럼 자리한 오래된 건물에 스쿨서점이 있었다. 나는 중학교에 입학하고 공부 잘하는 친구들에게 참고서라는 학습도우미가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학교에서 배급받는 교과서 말고는 참고서는 필요한 사람이 따로 구입한다는데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쯤은 수십 마지기 문전옥답도 농지개혁으로 소작인 들에게 빼앗기고 하루아침에 기울어진 가세는 삼시 세끼 밥 도 배.. 더보기
14.가스라이팅과 月子의 추억 2023.2.27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14. 14. 가스라이팅과 월자의 추억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여자 어린이들만 있던 우리 반에는 고등학교 상급생 수준의 처녀티가 물씬 나는 언니들이 네댓 명 있었다. 이들 중 어린이들이었던 친구들위에 대장으로 군림하던 월자.. 큰 덩치에 약간 의 안짱걸음에다 부리부리한 두 눈 만 보더라도 주눅이 드는 상주 사투리를 쓰는 월자는 우리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일 학년 때는 없었는데 아마도 3학년 때쯤 전학을 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반장을 뽑을 때 투표를 하면 우리 반은 늘 예쁘고 똑똑하고 상냥한 윤문자가 반장에 뽑혔었다 그 당시 최고 부유층이던 문자네는 아버지가 조흥은행 지점장 이셨기에 책보자기에 책을 싸서 들고 다니던 우리와는 다르게 문자는.. 더보기
12.천석꾼 만석꾼. 아랫채. 지금의 동서가구 건물이다 아랫채와 붙어있던 윗채. 화원이 있는자리가 그 당시 3칸으로 나뉘어 쌀가게가 세 들어 있었다 .가게 안쪽으로 사랑방과 안방이 있었고 나무헛간과 커다란 닭장과 장독대와 큰 마당에 펌프가 있던 윗채 건물.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12. 12. 천석꾼 만석꾼. 6.25가 끝나고 낡은 옛집에서 둘째 언니가 결혼식을 올린 건 기억나는데 작은 언니 결혼식은 웬일인지 전혀 기억에 없다. 그 당시 작은 형부는 안면에서 기차곱배에 마루타를 실어 도회지로 실어내는 큰 목상이어서 쓰러져가는 아랫채를 다시 짓기 위한 서까래를 결혼선물로 주었기에 초가집이던 아랫채를 허물고 방이 6개인 날아갈듯한 기와집을 올렸다. *지금의 동서가구 자리가 아랫채이다.* 새로 문을 연 여관도 옛 명성에는 못 미.. 더보기
9.D.D.T.와 간염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9.D.D.T. 와 간염. 큰 형부의 월북으로 삼 남매를 데리고 방물장수를 하며 죽을 고생을 하며 시래기죽으로 연명하던 큰언니가 친정으로 돌아왔다. 언니가 돌아올 때쯤 우리 집은 형편이 좀 좋아진 것이 엄마가 보부상처럼 상동광산을 드나들면서 번 돈으로 다시 중앙여관을 열었고 그때부터는 상동광산으로 드나드는 도매상과 소매상등 장사꾼들의 집합소로 우리 집 중앙여관은 늘 만원사례였고 또 5일 만에 서는 영주 장날에 면소재지에서 장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장국밥과 비빔밥 그리고 관공서 공무원들이 늘 예약하며 찾는 음식점으로 다시 옛날의 명성을 찾아가고 있을 때였다 나와 한 살 터울의 조카 영숙이 규영이 규철이등 친정살이 언니네 식구네 명과 엄마와 내가 안방에서 살게 되고 사랑방에는 아.. 더보기
11.나의 전성기초등학교시절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11. 나의 전성기 초등학교 시절.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난다.. 3명의 엄마가 낳은 시샘 많은 이복 동기들 속에 잡초처럼 세파에 휘둘리며 부대끼며 철부지로 자란 나., 사변 이후 몰락한 가정에서 온 가족이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으로 살아 가느라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그 누구도 나에게 신경 써 주는 사람 없었고 제대로 응석 한번 사랑 한 번 받아보지 못하고 야생화처럼 스스로 알아서 자란 가엾던 나.. 학교에 입학하고도 기초적인 한글공부는 물론 기초적인 덧샘 뺄 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그 와중에 구구단은 어떻게 9단까지 외웠는지.. 어떻게 한글은 떼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쩌면 내가 천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매년마다 열리는 학예회는 영.. 더보기
10. 서기 1952년... 2023.2.15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10. 10.서기 1952년... 막 일곱살이된.. 빌게 뜯어 먹은듯한 꿩 병아리 같은 병약하기 짝이 없는 나는 어느 날 불현듯 깨달았다. 더러더러 같이 놀아주던 소꿉친구들이 내 곁에서 사라졌단 걸.. 친구들이 왜 안 보이냐고 엄마한테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걔들은 모두 학교 갔다는 거였다. 그럼 나는 왜 학교 안 가? 하고 물었더니 너는 아직 학교 갈 나이가 아니라고.. 그때부터 나는 하루종일 대성통곡으로 온 집안을 시끄럽게 했다 나도 학교 간다고... 학교가 뭔지도 모르고 소꿉친구들이 다닌다니 나도 학교에를 가야 된다고 매일같이 발버둥 치며 행악을 해 대니 견디다 못한 엄마가 하루는 나를 데리고 읍사무소를 찾았다. 어떤 주사양반을 만나 나를 가리키며 저렇.. 더보기
8. 미군 하우스보이가 된 영동이오빠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8. 미군 하우스보이 영동이 오빠. 전쟁으로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남부여대 가솔을 이끌고 피난을 떠났었고 인민군들이 패망하고 도주하자 허물어지고 기둥만 남은 집으로 찾아 들었을때 인편을 통해 반가운 소식을 전 해 왔다. 우리 집에 이다바.. 심부름꾼으로 있던 영동이 오빠. 내가 언니 따라 학교에 가서 집에 가고 싶어 하면 영동이 오빠가 늘 업으로 왔었지. 네다섯 살 어린 기억에도 퉁퉁한 몸집에 까까머리 오빠는 늘 게다를 신고 있었다. 하긴 그 시절에 게다밖엔 없었을 테니까. 딸깍 딸깍 거리는 게다소리를 내며 땀냄새를 풍기며 나를 업고 둥기둥기 해 주던 쌍꺼풀진 선한 눈을 가진 마음씨 순둥이 같은 영동이 오빠는 천애고아로 영주에 흘러 들어온 비렁뱅이였는데 아버지께서 불쌍하다고 .. 더보기
7. 6.25의 단상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7. 6.25.쌀밥에 담긴 슬픈추억 폭격 맞은 우리 집의 기억도 잠시 우리는 상주여관 자리에서 살면서 그 혹독한 굶주림의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 식구들.. 갖 스무 살이 된 큰오빠는 학도의용군으로 군대에 갔고 사범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 열여덟 살이던 언니 둘은 가까운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임시교사로 취직해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나의 바로 위 아홉 살 더 많은 효덕오빠는 그 당시에 안동농고를 다니며 안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나? 효덕이 오빠에 대한 기억은 잘 안 나고 어느 날 다섯 식구가 자고 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어디선가 쌀밥 냄새가 나서 눈을 떠 보니 큰엄마와 아버지가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서 가만히 이불을 들치고 보니 한 밤중 호롱불 밑에 상덕이 계덕이..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