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8. 미군 하우스보이
영동이 오빠.
전쟁으로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남부여대 가솔을 이끌고 피난을 떠났었고 인민군들이 패망하고 도주하자 허물어지고 기둥만 남은 집으로 찾아 들었을때
인편을 통해 반가운 소식을
전 해 왔다.
우리 집에 이다바..
심부름꾼으로 있던 영동이 오빠.
내가 언니 따라 학교에 가서 집에 가고 싶어 하면 영동이 오빠가 늘 업으로 왔었지. 네다섯 살 어린 기억에도 퉁퉁한 몸집에 까까머리 오빠는 늘 게다를 신고 있었다. 하긴 그 시절에 게다밖엔 없었을 테니까. 딸깍 딸깍
거리는 게다소리를 내며 땀냄새를 풍기며 나를 업고 둥기둥기
해 주던 쌍꺼풀진 선한 눈을 가진 마음씨 순둥이 같은 영동이 오빠는 천애고아로 영주에 흘러 들어온 비렁뱅이였는데 아버지께서 불쌍하다고 밥이라도 넉넉히 먹으라고 주방 심부름꾼으로 두었단다.
나는 늘 이다바 영동이 오빠 등에 업혀 살았던 기억이 난다.
피난으로 헤어졌던 영동이 오빠가 어느 날 인편에 소식을 보냈는데 내성(봉화)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부대에 하우스보이로 살고 있다며..
"정하가 너무 보고 싶으니 어무이요 꼭 정하 데리고 나를 한번 면회하러 와 주이소" ..하고
당부를 하더란다.
마흔세 살인 엄마는 여섯 살인 나를 데리고 40리 내성까지 버스를 타고 물어물어 미군부대를 찾았는데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하다.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미군부대는 입구에 총을 찬 헌병 길다란 장총을 어깨에 맨 눈이 파란 양키들이 늘어 선 검문 초소가 있었고 아마도 한국말하는 통역이 있었던지 영동오빠 이름을 대자 어떻게 연락을 받았는지 오빠가 달려오는 게 멀리서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미군부대 안에는 국방색 천막
막사가 즐비한데 영동이 오빠가 마중 나와 나를 목마태우고 막사로 들어가니 키 큰 양코배기들이 휘파람 불면서 손뼉 치면서 서로 자기한테 오라고 손을 내미는데 나는 너무 무서워서 오빠뒤에 숨어서 무서워 무서워 하면서 미군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계속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오빠가 목마르지? 하면서 큰 깡통에든 쥬스를 따라주는데 너무 시어서 구역질을 하며 토해냈고
미군병사들이 단발머리 여섯 살짜리 계집아이인 나를 예쁘다고 자기들 간식을 자루에다 선물이라고 넣어 주었는데 집에 와서 보니 초콜릿과 미루꾸(캐러멜) 온갖 과자 납작한 캔에 든 전시 비상식품들과 1회용 커피 치약 면도크림등 한 보따리를 얻어온 기억이 있다..
오랜만에 만난 영동이 오빠는 땀내 풍기던 까까중대가리 오빠가 아닌 미군과 같은 군복바지에 국방색 난닝구를 입고 양코배기 군인들과 쏼라쏼라 대화도 나누고 휘파람을 불어 가면서 군인들 신발도 닦아주고..
옛날의 이다바 오빠가 아니라 의젓하고 멋있는 청년으로 변신해 있는 게 신기하고 보기 좋았다.
그 후 도민증을 만들 때 아버지가 보증을 서서 도민증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동이 오빠
지금도 그 선한 웃음
삐딱삐딱 걷는 씩씩한 걸음걸이
성낼 줄 모르던 착한 심성으로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아마 100살쯤 되지 않았을까?
내 머릿속에 지워지지 않는
영동이 오빠가 가끔씩 보고 싶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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