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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아버지의 전성시대 1. 지금으로 말 하자면 꽃미남 인기스타... 아니 꽃 중년의 잘 나가는 우리 아버지에게 새로운 로맨스가 생겼으니... 우리집 중앙통을 직선거리로 200미터쯤 위쪽에 상주여관을 경영하던 어여쁜 부인이 한분 계셨다. 지금으로 말 하자면 財색을 겸비한 아담하고 곱상한 상냥하기 짝이없는...귀부인이라고 할까? 40대 중반의 이옥강 부인은 배우자도 소생도 없이 혼자서 영주땅에 흘러 들어와 큰 여관을 경영하고 엄청남 돈을 모은 전설적인 인물이었던것 같다. 영주읍내의 돈푼이나 있다는 한량들은 누구나 호시탐탐 눈독을 들이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인기절정의 유한 부인이셨단다. 이 부인이 어느날 사람을 보내어 우리 아버지를 은밀히 부르셨단다. 궁금하기도 하고 무슨 일인가 싶어 부인을 만나 대면하여 무슨 연고로 나를 불렀느냐고 하.. 더보기
아버지의 전성시대 2. 사업이 번창해지고 식구도 불어나 집안에는 활기가 넘쳐나고 아버지는 날마다 사정에서 활을 쏘며 여유롭게 보내셨다. 오매불망 조부모님께 지은죄는 손자들을 안겨드리지 못한것을 후회하며 어찌되었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손을 불려야 한다는게 아버지의 목표였으리라 두 부인이 낳은 첫아들들은 낮으로 자른 탯줄에 염증이 생겨 모두 잃고 그 후로는 태어나는 아기들의 탯줄은 탈 없으라고 아버지가 모두 이빨로 끊으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열한살 나이던 1905년 결혼하여 30년동안의 결혼생활에서 두 부인에게서 얻은 생존 자녀가 아들2 딸3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었던지 어찌되었던 한 살이라도 젊을때 아들을 더 봐야한다고 1936년 반남박씨 3번째 부인을 또 소실로 들여앉혔으니 아들만 내리 삼형제를 낳았으나 역시 큰아들은 병사했다.. 더보기
내 아버지의 전성시대 3. 103종 싱거미싱... 그리고보니 내 아버지는 조선시대 사람이었네 단기 4227년 서기 1894년 고종31년 명치 27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관이라는 최신식 영업장을 운영하고 양조장을 경영했으며 수십필의 말을 가지고 차부까지 운영하셨으니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시다. 여기저기서 돈이 마구 들어오고 부리는 종업원들의 수도 엄청났고 가을이면 콩을 열댓가마씩 장을 담그고 도지로 준 문전옥답에서 추수하는 백옥같은 쌀로 밥을 지어내니 여관은 넘쳐나는 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단다. 해주오씨 우리 엄마는 음식솜씨 바느질솜씨가 빼어나 손으로 만드는 모든것은 명품중의 명품이되고 그 시절 미국인이 싱거미싱을 월부로 판매하고 다녔는데 손바느질로 유명한 엄마의 소원이 미싱이라는걸 한번 써보고 싶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큰 바퀴가 달.. 더보기
내 아버지의 청년시절.2 영주 읍내로 이사를 하신 단아한 이목구비에 훤칠한 미청년으로 거듭나신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고향을 아직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 영주군 부석면 임곡리가 아버지가 태어나 20대 까지 사시던곳인데 내 고향 영주에서 50리나 될까? 그런대도 불구하고 어려서는 아무것도 몰라서 또 결혼해서는 출가외인이라서 중년에는 애들키우고 살림하고 먹고살기 바빠서 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 연세 51살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나는 내가 태어날때부터 안계시던 내 아버지의 아버지... 내 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런 내가..환갑이 지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십년만에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을때 우연하게 발견한 선대 우리 조상들의 비석에서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평소 아버.. 더보기
내 아버지의 청년시절.1 할머님의 간곡한 만류와 타이름으로 정신을 차린 아버지께서는 스무살이 되도록 기다리던 자식을 보실수가 없었고 소년 가장 이었지만 충직한 하인들과 그 식솔들이 아버지를 도와 집안을 모범적으로 잘 이끌어 가게 되셨단다. 그 후...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로도 아버지는 술과 노름을 멀리하고 글을 읽고 서예에 힘쓰고 시조를 외우고 단가를 배우고 익히며... 한편으로는 불교에 심취하셔서 초암사라는 절에 다니시며 심신을 맑게하고 수신제가 할 양으로 당신의 수양을 닦기에 여념이 없으셨단다. 그 후 로도... 가진 재산 축내지 않고 술도가를 경영하셨고 술지게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양식으로 나누어 주시며 나날이 재산을 불려가던 어느날... 환갑이 지난 하인이 마당을 쓸다가 이상한일이 있다며 아버지께 고하더란다. 작은서방님.. 더보기
내 아버지의 소년시절1. 아버지 나이 열 여덟이 되던해 장보등 할아버지께서 그리도 원하던 손주를 보지못하고 1912년 울화병으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게 되셨단다. 문단댁 우씨 손자며느리가 시집온지 7년이요 스무살 물 오른 나이였으니 손주를 보고도 남았겠지만.. 손이 귀한 집안이라서 인지 아버지는 남매처럼 큰엄마와 의좋게 지내셨지만 조부모님의 소원인 손자를 안겨주지 못하셔서 저승에 가신 할아버지께서 제대로 눈을 감지 못하셨을거라는... 집안의 대들보가 무너진것처럼... 천지가 무너져도 왼눈하나 깜짝 않을만큼 당차시고 여러명 하인들과 그 식솔들을 거느려도 누구한사람 불평불만 없게 하시고 이재에도 밝아 해마다 땅을 불리시던 할아버지의 사망은 마른하늘에 날벼락과도 같은 감당할수없는 두려움이였단다. 이제 열여덟살 어린 내가... 어떻게 .. 더보기
내 아버지의 유년시절 2. 장가가 뭣인지 혼례가 뭣인지도 모르고 치른 초례와 장례를 치른지 1년후 4대독자 손자를 하루빨리 장가보내 자손을 보시겠다는 장보등 할아버지의 욕심에 11살이된 1894년생 우리 아버지는 문단리의 우씨댁 1892년생 13살짜리 낭자와 다시 혼례를 치르게 되셨단다. 전사의 일도 있고하여 장보등 할아버지께서 물어먹듯 당부하셨단다. 이번에도 초례만 치르고 집에돌아오면 너는 내 손자가 아니다. 내 말을 거역하여 또 다시 상객의 팔뚝을 물어 뜯거나 집으로 돌아온다고 우새스러운 꼴을 보인다면 가문의 수치이니 내치고 두번 다시 받아주지 않겠으니 어찌되었든 사흘은 처가댁에서 지내다 와야한다고 엄명을 내리셨단다. 이제 아홉살 철부지가 아닌 11살 새신랑이 되었으니 또다시 집에 돌아가겠다고 할수도 없고할아버지의 엄명이 무서.. 더보기
내 아버지의 유년시절 1. 내 아버지 장 奭자 柱자 고종 31년 단기 4227년 서기 1894년 4월 14일 경상북도 부석면 임곡리 634번지에서 장 得伊의 독자 아들로 태어나셨다.. 윗대로 부터 4대 독자로 태어나신 귀하신 몸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에 없는... 아버지가 몇살인지 모르는 아주 어린 나이에 병환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조부모님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 유년시절을 여유롭고 편안하게 보내셨다고 한다. 조부이신 장보등 할아버지께서는 임곡면 일대 수백 마지기의 70리를 남의 땅 을 밟지 않을 만큼 광대한 농토를 소유하신 고을의 거부이자 터주대감 이셨단다. 내 나이 예닐곱살의 어린 나이때 였지만... 밥상 머리에서 아버지의 어린시절을 회상 하실때의 말씀이 지금도 또렸이 내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있음이 지금 24년전 돌아가신..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