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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7. 6.25의 단상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7. 6.25.쌀밥에 담긴 슬픈추억

폭격 맞은 우리 집의 기억도 잠시 우리는 상주여관 자리에서 살면서 그 혹독한 굶주림의 세월을 보냈다. 어느 날부터 보이지
않는 식구들..

갖 스무 살이 된 큰오빠는
학도의용군으로 군대에 갔고
사범학교를 졸업한 스무 살
열여덟 살이던 언니 둘은
가까운 면소재지 초등학교에 임시교사로 취직해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나의 바로 위 아홉 살 더 많은 효덕오빠는 그 당시에 안동농고를 다니며 안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나?

효덕이 오빠에 대한 기억은 잘 안 나고 어느 날
다섯 식구가 자고 있는데
꿈인지 생시인지 어디선가 쌀밥 냄새가 나서 눈을 떠 보니 큰엄마와 아버지가 두런거리는 소리에 잠이 깨서 가만히 이불을 들치고 보니 한 밤중 호롱불 밑에 상덕이 계덕이 오빠 둘을 깨워
쌀밥을 먹이고 있었다.
여섯 살 즈음이던 나는 깨어있다는 표시로 킹킹댔는데 큰엄마가 오더니 이불을 덮어씌우며 망태영감 왔다고 빨리 자라고 자장자장 하며 일어나지 못하게 했다. 그래도 오줌 마렵다고 칭얼대니까 요강을 갖다 주며 빨리 쉬하고 자라고 이불을 당겨 덮어씌우고 투덕투덕 두드렸다

아버지는
허 그것 참.. 허 그 거참.. 하고
혀를 차고 나는 죄지은 사람처럼 주늑이 든 채로 억지로 들어눕혀 졌는데 제삿날 상에 오르는 것 같은 쌀밥냄새에 침을 삼키는데 그 침 넘어가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아버지가 들을까 걱정되어 이불을 덮어쓰고 침을 삼켰다.

시래기죽으로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겨우겨우 연명하던 6.28
사변 이후의 극심한 고난의 때..

엄마도 없이 큰엄마 손에 맡겨진
그 어리디 어린 여섯 살 막내딸이 자다가 깨서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세째 작은댁이 버리고간 아들 둘을 도둑밥을 먹이고 싶으셨을까 그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난다.

그 시절 40대 초반이던
내 엄마는 우리 가족들의 연명을 위해 보따리 장사를 나갔었단다.
어렸을 때 들은 단어 들이지만
80줄에 들어 선 내 귀에 아직도
생생히 남아있는 단어들은..

상동광산..
제무시트럭..
그리고 중석이라는 단어다.

그 단어들이 내가 들은 단어가 맞는지 확인 차 어제 구글에서 검색해 보니 놀랍게도 강원도 영월에 상동광산이 있고 중석이 무엇인지 검색해 보니 텅스텐이라고 한다.

(상동광산은 대한민국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텅스텐 광산 중 하나이다. 1916년 4월 황순원이라는 사람이 노두를 발견하였다고 알려져 오고 있다. 위키백과)

*중석



설명

중석(重石, tungstate)은 텅스텐과 산소와 다른 금속이 결합한 광물이며 텅스텐산과 다른 금속의 염인 것이 많다.*


제무시라고 들었던 것은
GMC트럭...

마흔서너 살쯤의 새파랗게 젊은 엄마는 시장이 멀고 일상적인 교통편이 없었던 첩첩산중
오지 중의 오지 상동의 광산촌 주민들과 상동광산 인부들의 생활필수품과 소주 양초 석유 비누등을 트럭에 싣고 상동으로 가지고 가서 팔고 그 판매대금으로 중석을 사서 허리에 차고 영주로 나와 판매를 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중석은 개인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 아닌 불법적인 위험한 상행위였던 것 같은데 일개 아녀자인 엄마가 전시에 어떻게 그런 루트를 알았으며 헌병과 미군들의 몸수색에도 젊은 아녀자였기에 치마를 걷어붙이는 검색이 없었기에 무거운 중석을 전대에 담아 허리에 둘러 삼베 고쟁이에 삼베치마 속에 숨겨 나왔다니 아마 중석장사가 우리 식구들의 죽기 살기로 매달렸던 생명줄이 아니었을까?

어린딸을 며칠씩 떼어놓고
제무시 짐칸에 앉아 몇백 리 울퉁불퉁 험한 산길을 달려오면 머리에 동여 멘 머릿수건위에 쌓인 먼지가 수북하고 얼굴에 켜켜이 앉은 먼지로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는 이야기도 기억한다.

이렇게 가족을 위해 한평생을 희생봉사한 오옥성 여사는 평생 남편의 사랑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하고 인고의 삶을 사신게 너무 가엾고 안타깝다.

닷새만에 한 번씩 물건 하러 영주에 오는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고 다시는 가지 말라고 치마꼬리를 붙잡고 잠들었다 깨어보면 어느새 신기루처럼 사라진 엄마가 왜 그리 보고 싶었던지..

중석.. 텅스텐이 얼마나 무거웠으면 重錫이라고 불리었을까?
젊은 시절 중석전대를 허리에 감고 다닌 우리 엄마 오옥성 여사는 평생토록 허리 아픈 고질병으로 고생을 하셨다
이렇게 죽을힘을 다해 벌어온 돈으로 오밤중에 작은오빠 둘만 냄비에 쌀을 안쳐 흰쌀밥을 해 먹인 것 지금 생각해도 양심불량이다..

울아버지와 착하신 울 큰엄마는 에미가 버리고 간 핏덩이 같은
두 눈이 똘망똘망한 어리디 어린두 아들이 너무나 불쌍 했겠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