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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14.가스라이팅과 月子의 추억

2023.2.27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14.

14. 가스라이팅과 월자의 추억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여자 어린이들만 있던 우리 반에는
고등학교 상급생 수준의 처녀티가 물씬 나는 언니들이 네댓 명 있었다.

이들 중 어린이들이었던 친구들위에 대장으로 군림하던 월자..

큰 덩치에 약간 의 안짱걸음에다
부리부리한 두 눈 만 보더라도 주눅이 드는 상주 사투리를 쓰는 월자는 우리 모두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일 학년 때는 없었는데 아마도 3학년 때쯤 전학을 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반장을 뽑을 때 투표를 하면 우리 반은 늘 예쁘고 똑똑하고 상냥한 윤문자가 반장에 뽑혔었다

그 당시 최고 부유층이던 문자네는  아버지가 조흥은행 지점장 이셨기에 책보자기에 책을 싸서 들고 다니던 우리와는 다르게 문자는 가죽 란드셀을 메고 다니는 특별한 애였다.

부끄럼도 많고 상냥한 데다
급우들에게 친절하기도 한
윤문자..

월자와 한 반이 되고부터는 졸업할 때까지 공부도 잘 못하는 월자에게 기가눌린 급우들 덕분에 압도적인 득표로 반장이 되기 시작했고 개표가 끝나면 반장에서 떨어 진 문자가
얼굴이 빨갛게 상기되어  책상에 엎드려 한나절씩 울때는 친구들의 어떤 위로도 소용이  없었다.

우리들 보다 거의 배나 나이가 많았던 월자는 어느 때부터 우리들 위에 군림하면서 자기 눈에 거슬리는 친구들은 고무줄놀이에서 술래잡기 놀이
땅따먹기등 모든 놀이에서 제외시키고 어느덧 우리 반 아이들은 월자의 좌지우지에 익숙한 꼬붕 졸개들로 전락하고 말았다.

콧방귀를 킁킁대며 대장노릇을 하던 월자네는 원당천 너머 산골짜기 단칸방에 남동생과 살고 있었고 엄마는 냉면집 주방에서 일을 하는.. 나중 알고 보니 냉면집 외손녀라고 들었다.

아마도 상주에서 살다가 피난 다녀온 후 친정 쪽으로 이사를 왔는지 중간에 우리 중부국민학교에 전학을 온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 월자는 우리보다 두배나 먹은 나이탓인지 엄청난 덩치에 한 억바리 하니 공부는 못했지만 소도 때려 잡을수 있는 그 무지막지한 힘과 언변으로 조무래기 친구들을 사로잡아 반장도 했고 나 처럼 철부지 코흘리게들을 제 맘대로 부리는 부하로 삼아 학교수업이 끝나면 우르르 몰고 산비탈에 굴러다니는 솔방울을 줍게 하고 모둠밥 해 먹자면서 쌀도 한 됫박씩 퍼 오라는 지엄하기 까지 한 협박성 가스라이팅이 계속되었다..

월자의 눈밖에 날까 두려워 엄마몰래 쌀을 퍼다  주면 솔방울을 주워야 밥을 해 먹는다고 구호 밀가루 포대를 내밀면 땔감으로 필요한 솔방울 줍느라고 산등성이 훑으며 다니기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3년을 월자네 군불 집힐 솔방울 주워 오라는 가스라이팅에 시달렸었다.

월자랑 비슷한 나이의 곱상한
김창희..
창진리 란 곳에서 30리 길을 걸어 학교에 온다는데 마음씨가 고와 진짜 큰언니 같았는데
월자야 말로 고삐 풀린 말괄량이처럼 제멋대로인 처자였다.

그 어렸던 초등학교시절
월자와 눈만 마주치기만 하면
왜 그리 두렵고 무서웠던지..
지금 생각하면
그 부하 노릇 하느라 밥도 굶어가며 월자에게 칭찬받는 기쁨에
땀을 빨빨 흘리면서 솔방울 줍고
잔솔가지 주워다 진상했던 철없던 그 시절이 웃음이 난다.

친구들 무리에서..
또한 학급반장 우두머리 월자가 세력을 행사하는 세계에서
따돌림 당 하지 않으려고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 잘 듣던 철부지 시절..
나는 왜 월자에게
그렇게나 사랑받고 싶었을까?

생각만 해도 두려움으로
가슴 두근거려오던 월자를
30여 년 후 우연히 명동길 걷다가 월자와 닮은 사람을 발견하고
쫒아가 팔을 잡았다.

혹시?  고향이 영주?
영주에서 초등학교 나오지 않았냐는 물음에 맞는다고..
너 월자 아니냐고 물었더니
맞다면서 너는 누구냐고..
내 이름을 알려주니
아 맞다 맞다
그 비리비리 말라깽이였던 네가
이렇게 변하다니..
나를 어떻게 알아봤냐고..
우리보다 거의 여덟 살쯤 많았던 월자는 초등학교 때 이미 다 컸는지 조금 나이 들어 보이는 것 말고는 하나도 변함이 없는 그때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에 상주 사투리
중간중간 콧방귀 킁킁대는 것까지..

그 후 초등학교 동창 모임에 딱 한번 참석한 월자는 남편이 건축관계 일 에 종사한다며 또다시 좌중을 휘어잡고 싶어 했지만 이미 어른이 되어 저마다 당당한 콧대 높은 아줌마가 된 우리 친구들에게 씨알도 먹히지 않자 그 후론 소식을 끊고 연락 두절이 되었다.

그리고 어언 30여 년이 지났건만 학폭이니 가스라이팅이니
TV 뉴스를 접할 때마다
월자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건
왜일까?

지금 같으면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가스라이팅..

그때는 가능했었다는 걸
돌이켜 생각해 보면
누구에겐가
인정받고 싶은 간절한 마음
그건 사랑을 받지 못해서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었을까?

나이 어린 동생같은 동창들을 마음대로 주물러 터트리던 그시절 월자가 행사한것도 리더쉽의 일종이 었을까?

철 없었던 어린시절을 회상하며
그 옛날 추억의 한 페이지를
펼쳐보며 웃음 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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