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종 싱거미싱...
그리고보니 내 아버지는 조선시대 사람이었네
단기 4227년 서기 1894년 고종31년 명치 27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관이라는 최신식 영업장을 운영하고 양조장을 경영했으며 수십필의 말을 가지고 차부까지 운영하셨으니 참으로 놀라우신 분이시다.
여기저기서 돈이 마구 들어오고 부리는 종업원들의 수도 엄청났고 가을이면 콩을 열댓가마씩 장을 담그고 도지로 준 문전옥답에서 추수하는 백옥같은 쌀로 밥을 지어내니 여관은 넘쳐나는 손님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단다.
해주오씨 우리 엄마는 음식솜씨 바느질솜씨가 빼어나 손으로 만드는 모든것은 명품중의 명품이되고 그 시절 미국인이 싱거미싱을 월부로 판매하고 다녔는데
손바느질로 유명한 엄마의 소원이 미싱이라는걸 한번 써보고 싶다고 해서 아버지께서 큰 바퀴가 달린 공업용 103종 싱거미싱을
미국으로 주문해서 두달만에 월부로 들여놔 주셨다고 한다.
손바느질로 하루걸려도 못만드는 옷은 한번 밟으면 커다란 바퀴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하며
순식간에 박히는 치마폭은 하루에 열벌이고 스무벌이고 만들수있고 저고리 섶이며 배래며 깃고대도 그린듯 예쁘게 만들어지니
그 시절 영주에서 명성이 자자한 명창 명기들의 비단 맟춤옷은
우리엄마의 싱거미싱이 도맡아 해주었다고 한다.
또 언니에게 새롭게 들은 이야기는 그 시절 싱거 미싱을 들여놓은 덕분에 남자들의 조끼를 수백벌씩 만들어 팔기도 했다고 한다. 손재주 뛰어나신 아버지가 제단을 하고 엄마는 미싱으로 박고....
맵씨나는 조끼가 소문에 소문을 타고 대구 서울 안동 할것없이
주문이 밀려 밤낮으로 미싱을 돌려댔단다.
열심히 열심히 노력한 끝에
2년 동안 갚으라는 월부를 다섯달만에 다 갚으니 코쟁이 미국인이 깜짝 놀라며 어떻게 이 비싼 물건값을 다섯달만에 다 갚을수 있느냐고 놀라면서 선물이라고 수십종류의 노루발과 오색의 미싱실을 한아름 주었다고...
그 싱거미싱은 우리 엄마와 반세기를 같이 지내다가
우리 올케가 신식 브라더 미싱과 맞바꾸게되어 지금 생각하면 우리엄마의 유품인데 나 라도 간직하지 못한게 한스럽다.
여름이면 노방에 갑사에 숙고사 바지 저고리
잠자리 날개같이 아른거리는 세모시 두루마기
겨울이면 명주 솜 바지 저고리에 중국비단 덧저고리에 모본단 마고자 온갖 비싼 비단옷은 엄마의 뛰어난 바느질 덕분에 빛을 발했고 비단옷에 은단추 옥단추의 맵씨있는 마고자에 세비로 두루마기 차림의 아버지는
읍장보다 경찰서장보다 더 선망의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태어나서 반세기 동안 여유와 풍요속에 생활하신 우리 아부지....
멋과 풍류를 아시는 분이셨다.
늘 시조를 읊조리셨고 국궁에 심취하셔서 지금으로 말하면 읍내 유지들과 국궁 동호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이 되셨단다.
내 아련한 기억에도 우리집
이다바들이 정성들여 만든 음식들을 손수레에싣고 하얀 베 보자기를 덮어 심부름꾼이 나를때는
막내딸인 내가 항상 그 수레를 타고 아버지의 사정에 놀러갔었다.
구성공원 백사장 ...
황청다리밑에 큰 가마니에 표식을 해서 걸어놓고
허리를 질끈 동여 맨 사수들이 엄지 손가락에 각지를 끼고
시위를 힘껏 당겨 화살을 날려 명중하면 멀리 떨어져 지켜보던 하인들이 깃대를 흔들었고
깃대가 흔들리는걸 본 기생들은 한꺼번에 지화자~지화자~를 소리높여 노래를 부르며
부채춤을 추던 모습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마도 내가 네살이나 다섯살쯤 이었을 텐데도 그런게 다 기억난다고 언니들한테 이야기하면
아주 어렸을때 이야기인데 어떻게 그런걸 다 기억하느냐고
참 기억이 대단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
내 아버지의 보쌈당한 李萬女 할머니의 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몇십년동안 아버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
피맺힌 섪은 이야기였다.
종적을 감춘지 수십년동안 사람을 풀어 수소문한 끝에
보쌈당한 어머니가 두 아들을 낳고 잘 사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그래도 어머니가 당신을 버린것이 아니라 보쌈을 당해 어쩔수 없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 계신지 알면서도 살아생전 찾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가 아랫사람들을 보내
어머니의 시신을 모셔왔다고 한다.
울며불며 그렇게는 안된다고 애원하는 .. 당신의 어머니가 낳은 두 남자동생들에게 나는 어려서 내 어머니를 너희아버지가 빼았아갔고 평생을 어머니를 그리워 한이 맺힌 사람이다.
이제 살아서 너희가 실컷 차지하고 함께한 어머니를 죽은 몸이라도 내가 모신다는데 무슨 말이 많느냐...
빼앗은 것은 제자리에 돌려놔야 하느니라 하고 어머니의 시신을 모셔와 선산에 모셨단다.
그후..이만녀 할머니의 삼년상이 나던해 두 동생이 떡을 한 말 씩해서 지고 온것을 동네 어귀에 발도 못부치게 해서 쫒아 보내셨다는데...
아버지 생전에 얼마나 한이 맺히셨고 얼마나 어머니가 피눈물 나게 그리우셨을까..
불가항력...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우리 할머니의 보쌈이 아버지 한평생 살아 오시면서 얼마나 큰 고통이고 가문의 수치라고 여겼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버지의 심정이 이해가된다.
그 동복 형제들과는 돌아가실때 까지 평생토록 만나주지를 않았다고 하니....
젊었을적...한참 전성기의 아버지는 겁도 많으셨던 모양이다.
영주 갑부로 소문 자자한 우리집엔 독립군들이 독립자금 내놓으라고 우리집 담장이나 현관밑에 편지를 넣어놓고 어디어디에 돈 얼마를 넣어두거라...그러면 옛날에 화적에게 당한것이 생각나 벌벌 떨었다고 하셨다.
어느때는 독립군들이
어느때는 이북 좌익들이
군자금 내어놓으라고 협박을하고 겁을 주었고 화를 면하려고 때로는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많은 돈을 독립자금으로 내어주셔셨단다.
집안이 날로 번창해지자 평소에 심취하면 불교에대해 그 뿌리가 어떤곳인지 석가모니의 태생지인 인도땅을 가보기를 소원하여
청년시절 몇개월에 걸쳐 실크로드를 따라 인도까지 다녀오셨단다.
그 이야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삼년전 금호동 월세방에서 가난하게 살고있는 ..당신의 막내딸이 사는모습을 돌아보시며 내게 해 주신 말씀이다.
그리고 나서 꿈에 석가모니와 문수보살님의 현신을 뵙고
해중오석을 사 들여 고명하신 조각하는 스님을 집에모셔 일여년만에 석가모니불과 문수보살 두 분의 부처님을 조성하시고 집안에 법당을 만들고 아침저녁 공양을 드리셨다고한다.
그때 아버지가 아침공양 바치면서 울리던 놋쇠로 된 종과
상아로 만든 종치는 막대는 지금 내가 고이 간직하고있고
나중에 요한씨의 한의원이 명성을 얻게되자
금호동 451번지에 대지200여평을 사서 2층으로 번듯한 건물을 짖게되자 아버지께서 집에 모시던 문수보살 부처님을 품에 안고 올라오셔서 요한씨에게 맡기시며 평생 모셔달라고 부탁하셨는데 30대 후반. 철딱서니 없던나는 아침 저녁 정한수 떠놓기가 힘들어 관음보살 부처님을 맡긴 사찰에 두번다시 되돌려 달라고 하지않겠다는 계약서를 쓰고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찰에 희사를 했다.
우리 아버지께서 봉안하신
두 분의 부처님은 올케가 신도회장으로 열심히 다니고 있는
대구의 한 사찰의 불단에 금박으로 새 옷을 입고 아름답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높이 받들어 모셔져 있다고 한다..
( 나는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나는 모든것을 가져봤고 모든것을 누려봤고 젊어서 아무도 꿈도 꾸지못할
부처님의 나라 인도땅 천축까지 다녀왔고
금강산의 유점사까지 몸종이 이끄는 말을타고 유람을 했다.
나보다 더 호화롭고 나보다 더 호강한 사람은 이세상에 없을게다.
젊어서 다 누려봤으니 내가 언제 세상을 떠나든 아쉬울게 없다.
다만 해방둥이로 테어나 6.25 사변으로 하루아침에 몰락한 가정에서
가장 힘들게 자란 막내딸인 너에게 하나도 해 준게없어 미안하다.
하지만 지금 이루어낼수 없는 소원이라도 마음속에 품고있으면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지리니
나는 너에게 이 말을 당부하고싶다.
나도 마음속으로 오매불망 빌고 빌었더니 여관을 할때도 그랬다.
영주에서 제일가는 여관을 지으리라...그런 내 생각대로 모든것이 이루어지더라
그러니...한가지 생각을 변치말고 마음속에 항심을 가지고 새겨두거라
이게 너한테 남기는 애비의 마지막 말이다.) 라고 하신 ......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내 귀에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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