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읍내로 이사를 하신 단아한 이목구비에
훤칠한 미청년으로 거듭나신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고향을 아직 한번도 가 보지 못했다.
영주군 부석면 임곡리가 아버지가 태어나 20대 까지 사시던곳인데
내 고향 영주에서 50리나 될까?
그런대도 불구하고 어려서는 아무것도 몰라서
또 결혼해서는 출가외인이라서
중년에는 애들키우고 살림하고 먹고살기 바빠서
나의 뿌리에 대해 생각해볼 겨를이 없었다.
아버지 연세 51살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나는
내가 태어날때부터 안계시던
내 아버지의 아버지...
내 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런 내가..환갑이 지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후
십년만에 아버지의 산소를 찾았을때 우연하게 발견한
선대 우리 조상들의 비석에서 엄청난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평소 아버지께서 우리를 뼈대있는 양반가문의 자손이라고 늘 말씀하셨고
양반이라는 인동장씨 가문과 뿌리와 전통을 남달리 아끼고 주장하셨어도
나는 너무 어렸기에 ..
그리고 여자였기에 조상이나 뿌리에 대해 관심도 없었는데 나이들어 내 윗대 조상들의 비석에 새겨진 품계를 보고서야
내 뿌리 아버지가 그토록 말씀하시던 우리 가문이 어떤 가문인가 자꾸만 파고 들어가게 된것이다.
내 몇대조 할아버지 판돈녕부사 할머니 파평윤씨 숙부인
내 몇대조 할아버지 판중추부사 할머니 창원황씨 숙부인....
우리 가문이 화계리에 종가를 둔 연복군이 시조이며 그 자손이란것
참으로 뿌리깊은 양반자손이라고 할수있는 그런 집안에 내가 태어나다니....
조상 윗대부터 나랏님으로부터 하사받은 사방 70리의 전답은
어려서 부터 성인이 될때까지 부의 상징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선망이 대상이 될수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론 아버지를 옥죄는 도둑들의 위협과 협박은
가족의 안위를 걱정하게하는
또 다른 사슬 이었으리라
아버지가 영주읍내로 이사를 하시려고 많은 재산을 처분하셨기고
조금더 번화하던 읍내 영주로 솔가 하신후로
아마도 아버지 30초반..
1925년 즈음 부터
젊은 청년이던 아버지는 말과 마차를 수십필 마련하여
마부들을 거느리고 시골로 다니며 나락을 구매하여
정미소에서 도정을 하는 곡식 장사를 하셨다고 언니에게 들었다.
한번 집을 떠나시면 시골 구석 구석 다니시며 모은 나락을
마필에 싣고 영주까지옮겨오면서 이 거리
거리 주막에서 식사와
잠자리를 해결하셨다고 한다.
그 시절이 아버지의 청년 시절이었으니
그리고 집이 여부하여 비단옷에 시종이 끄는 말을 타고 다니신
귀공자였던 아버지는 그 당시 시골 구석 주막의 볼품없는 음식들과 땟국 흘러 찌든 냄새 진동하는 지저분한 이불과 빈대 등등...
음식과 잠자리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영주에다 맛있고 정갈한 음식과
깨끗한 잠자리를 제공하는 여관을 열어 길손들이
편히 쉴수 있는 장소를 제공 해야겠단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는 교통도 불편하여 그나마 있는 사람들은
마차나 소달구지가 교통수단을 이용했고
대체로 등짐 장수등
이고 지고 도보로
이마을 저마을 돌아다니는 장사꾼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옛날 옛적 ...
아버지의 꿈은 객실을 많이 가진
큰 여관을 하는것이 꿈이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말하면 참으로 뛰어난 쎈스를 가지신 분이셨다.
시골 고향집은 넓고도 컷지만 백여칸 고래등같은 기와집을 짓고 영주에서 제일가는 여관을 운영해보는게 꿈이셨다니...
아버지가 부석면에서 11살 나던해 결혼을 하고
영주로 이사와서 설흔이 넘을 때까지 소생이 없으셨단다.
4대 독자인 아버지는 대가 끊길까 전전긍긍 하셨지만
두살 더 많은 문단댁
우리큰엄마 우씨부인에겐
애기가 들어서지 않아 어쩔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부부가 글슬이 좋아 20여년을 정답게 살아왔지만
4대 독자라는 트라우마를 떨쳐버리기 위해서라도
어찌 해서든지 자식을 낳아
조상 제사를 모셔야 한다는 강박감은 아기를 가지지 못하는 큰 엄마가 더욱 심했던것 같다.
할수없이 작은 부인을 두어서라도 ..
자손을 보라던 우씨부인의 간곡한 부탁에
나이 한살이라도 더 먹기전에 소생을 보아야지...하며
아버지 나이 33살에 해주오씨 19살 처녀에게 새 장가를 드셨단다.
삼십대 초반의 훤칠한 귀공자로 성장한 우리 아버지가
사모를 쓰고 관례복을 입고 말을 타고 장가를 드는 모습은
해주 오씨 친가가 있는 보름골 온 동네사람들이
길을 메우고 나서 구경을 하셨다니 지금으로 말하자면 스타급 이셨던 모양이다.
외할머니 말씀을 들으면
초록색 도포를 입고 백말을 탄 아버지가 그렇게 잘 생길수 없었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하셨다
그 19살 신부 해주 오씨가 바로 나를 낳아준 내 엄마이다..
내 엄마는 무남독녀 외동딸로 태어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자랐지만 그때 유행하던 장질부사를 앓아
머리 카락이 다 빠지고 새 머리카락이 나올때까지
수건을 쓰고 살았다는데
그래서 아마도 좋은곳에 시집가기 틀렸다고 생각하고
재취부인으로 시집을 오셨지 싶다...
가엾어라 우리엄마..
식구도 한사람 늘었겠다 하고싶던 여관을 해보시려고
영주 읍내에는 그 시절에도 셋집이 있었던지
큼직한 집을 얻어 여관을 하셨는데 조금씩 돈을 모아 영주리 332번지 대로변에
몇백평 대지를 사서
지금으로 말하자면 최신식 설비를 갖춘 객실 20 여개에 영주 최고의 초 일류
중앙여관을 열게 되셨단다.
목깐통이 두개나 있는 최신시설을 갖춘데다가
서너명의 이다바(요리사/조리사)가
일본인이 경영하는 식재료상에서
최고의 재료를 구입해서
매일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니 중앙여관은
날로 번창하여 고급 손님들...
외지에서 부임하는 고위공무원 고위경찰관들
모두들 중앙여관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여관 청결검사를 나온 까달스럽기 짝이없는 일본 순검들이 다른집에는 구두를 신은채로 걸어다니며 검사를 해도 우리집 에서는 복도를 무릎걸음으로 기어다니며 검사를 하였다고
언니가 말해줬다.
그 시절..
영주 읍내에는 경찰서와 읍사무소 우채국
학교에만 있는 전화기가
우리 현관 유리박스에 걸려있던게
너댓살때의 내 기억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긴 복도를 통통통 뛰어다니며
갱깡마루에 걸려있던 전화기에 까치발을 들고 모시모시를 외쳐댔던 단발머리 내 모습이
꿈결처럼 아련히 떠오른다
여관이 잘되고 유명해지자 대구나 서울 같은곳에서
영주로 전근오는 고위공직자들의 예약객들이 넘쳐나고
그 당시 중앙선을 기획하고 철도를 놓기위해
일본인 측량 기술자들이 공사를 위해 영주에 머문곳이 우리집 이였으며
기술자들이 옮겨 다니기 위해서
많은 교통편이 필요한걸 알게된 아버지는 말 수십필과 마차를 준비하여 마부들로 하여금 깨끗한 옷차림에 예의바르고 공손하게 마차를 끌게하여 일본인 측량사와 그 가솔들의 이동을 도와주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택시회사도 차리게도 되었단다.
그러면서 승승장구 사업도 잘 되는 대다가 자식도 얻게되고
작은부인인 내 엄마가 19살 시집오던 1927년 아기를 가지게 되고
1927년 3월 6일 첫아들을 낳게되자
기적이 찾아왔는지 36세의 늦은 나이에 큰엄마가 다시
아들을 낳게 된것이1927년 3월19일 두번째 아들이 탄생했다.
사람들은 삼신이 시샘을 한거라고 했지만...
그 시절 36살에 초산 이라면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 아니었을까?
4대 독자인 아버지는 보름만에 두 아들을 얻은 기쁨에
사흘동안 동네방네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잔치가 막 끝나 흥겨운 여운도 가시기 전
3월 19일 출생한 큰엄마 소생 둘째 아들은 태어난지 보름도 못되는 5월 3일 지금으로 말하면 제대염으로 사망하고
3월 6일 출생한 첫아들 역시 1년만에 사망하는 슬픔을 겪으셨다.
아무리 기뻐도 잔치를 여는게 아니었는데 ..
하늘이 노 해서일까 어떻게 얻은 아들들이 이처럼 허무하게
내곁을 떠날수가 있을까..
식음을 전폐한 아버지는 그때부터 불교에 심취
아침 저녁 불공을 드리고
산 기도와 재수굿이
막힌 앞길를 열어준다며
무당을 전속으로 거느리고 사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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