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아버지 장 奭자 柱자
고종 31년 단기 4227년 서기 1894년 4월 14일
경상북도 부석면 임곡리 634번지에서 장 得伊의 독자 아들로 태어나셨다..
윗대로 부터 4대 독자로 태어나신 귀하신 몸 아버지
아버지의 얼굴은 기억에 없는...
아버지가 몇살인지 모르는 아주 어린 나이에
병환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조부모님의 극진한 보살핌 아래
유년시절을 여유롭고 편안하게 보내셨다고 한다.
조부이신 장보등 할아버지께서는 임곡면 일대 수백 마지기의
70리를 남의 땅 을 밟지 않을 만큼 광대한 농토를 소유하신
고을의 거부이자 터주대감 이셨단다.
내 나이 예닐곱살의 어린 나이때 였지만...
밥상 머리에서 아버지의 어린시절을 회상 하실때의 말씀이
지금도 또렸이 내 기억의 저장고에 남아있음이
지금 24년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년시절을 기록 할수있어
참으로 다행이지싶다
천하에 효손이었던 우리 아부지...
나중에야 알았지만 덕스럽고 조신한 우리 이만녀 할머니는
청상과부가 되신 어느날
야밤에 담을 넘어온 어느 누구인지도 모르는
불한당에게 보쌈을 당하셨다고 한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도 기억을 못하시는데
믿고 의지하던 어머니마져
어느날 갑자기 사라지자 우리 아버지의 심정은 어떻하셨을까?
대여섯살 어린 철부지 코 흘리게 였던 우리아버지...
졸지에 마른 하늘에 날 벼락과도 같이
어머니마저 생이별을 하셨으니
몇날 며칠을 날밤을 새워 엄마를 찾으며 통곡을 하셨단다.
어린 아들을 남겨두고 두고 보쌈을 당해 가족과 생이별을 한
우리 할머니의 마음은 어떻했으며
병사한 아들과 보쌈당한 며느리
졸지에 홀로남은 어린 손자를 바라보는 장보등 증조 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마음은 갈갈이 찢어지셨으리라
금이야 옥이야 사랑을 쏟아붓던 4대 독자어린 철부지 손자를 바라 볼때마다
피눈물을 흘리셨을 장보등 증조할아버지 의 상심이 상상만해도 가슴 저민다.
70리 영주 장날이면 할머니께서 곱게 풀먹인 모시 중의적삼에
잠자리 날개같은 細모시 두루마기를 입혀보내시면
에비 에미없이 자라는 불쌍한 손자를 내 어찌 바라보고 살겠냐고
한탄 한탄하시며 맨정신으로는 견딜수없으니
거나하게 술을 드시고 귀가 하실때는 모시 두루마기가 쑤세뭉테기가 되어
하인이 끄는 달구지에 실려오시곤 했단다.
아버지가 아홉살이 되시자 한시바삐 대를 이을 자손을 봐야한다며
그 시절 조혼의 풍습으로 4대독자 아버지를 30리 이웃마을 18살 처자와 정혼을 하고
어느날 사모관대를 차려입히고 하인이 시종잡는 말에 올라
신부댁에 당도하시고 마당에 쳐놓은 장막안 초례청에서 혼인예식도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잘 따라 하셨단다.
잔치음식이 한순배 돌아가고 아버지는 곳감 대추 밤을 드시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해거름이 되자 모두들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삼십리길을 돌아가야하는 상객들이 아버지를 불러앉혀 말씀 하시더란다.
도련님 오늘 초례를 치르셨으니 사흘밤을 이곳에서 묵으셔야 합니다.
사흘후에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하고...
어린 아버지께서 그 말을 듣고 평생 처음으로 낮선곳에
사흘을 묵어야 한다니 기함하듯 놀래 나도 집에 간다면서 대성통곡을 하고
그러면 안된다고 만류하며 말 머리를 돌려 떠나려는 상객에게 달려들어
팔뚝을 물어뜯어 버리셨단다.
처가댁 식구들도 모두 놀란것이
어린 신랑이 말머리를 붙잡고 집에 가겠다고 딩굴며 떼를 쓰며
상객으로 따라온 하인들에게 마구잡이로 달려들어 물어뜯어싸니
혀를 차며 바라만보던 장인어른이
할수없다 저렇게 펄펄 뛰다 기에 넘어 까무라치면 어찌할꼬
차라리 데리고 가라고 허락하시어
초례치른 9살 새신랑은 새색시와는 눈길한번 마주치지 않았구만
그 길로 말에 올라 본가로 돌아가게 되었단다.
그후에도 할아버지께서 정 붙여야 한다며
서너달에 한번씩 처가댁으로 아버지를 보내셨는데
옛날에는 초례를 치르고 친정에서 지내다가 삼년정도후에 시댁으로 들어갔다는데
아마 어린 신랑이 자라기를 기다려서 그랬는지 어쨌던
아버지의 첫 부인이신 분은 시집으로 신행을 오시기전 어느날부터인지
갑자기 사물을 분간할수 없으리만큼 눈이 안보이게 되셨단다
처가라고 찾아가면 열여덟 눈 먼 새색시는 다소곳이 앉아
더듬더듬 물래질을 하며 무명실을 자았는데
나이어린 새 신랑은 물레틀에 나무가지를 꽂아 실이 밖으로 삐져나가게 장난을 하면
18 새색시는 아무내색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채 한숨만 깊이 내 쉬셨다고
내가 그때 너무 철이없어 앞도 못보는 맹인에게 그런짓도 했다시며 회상하곤 하셨다.
그 첫번째 초례를 치른분은 9살짜리 어린 신랑과
초야도 함께하지 못하고
혼례를 올린지 1년만에 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열살되신 우리 아버지의 명주 두루마기가
서러운 새색시의 관에 넣어졌다고 기억하셨다.
열아홉살에 세상을 버려야 했던 아버지의 새색시...
초례만 치르고 훌쩍 돌아가버린 어린 새신랑의 얼굴이라도
제대로 기억에 남아 있으셨을까?
어쩌다가 실명을 하셨는지 ....궁금해하는 식구들에게
아버지의 기억으로 어른들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을때
망자의 손발을 싸는 주머니를 만들고 남은 창호지로 문창살을 발라
눈이 멀게되었다는 미신같은 소리를 기억하고 게셨다.
아마도 ..눈병이나 감염성 질환 또는 황반변성같은 질환이 아니셨을까?
지금 세상같으면 병원이라도 갔으면 고칠수 있었으리라
100년전 병원도 없던 까마득한 옛날얘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래도 열살짜리 새신랑이 상여가 떠날때까지 상제노릇은 하셨다니
신행도 오기전에 목숨을 버린 손자며느리가 너무 애석하여
증조할아버지께서 천금을 내려
꽃가마에 수십개의 비단으로 만든 만장이 나부끼는
장례행렬이 참으로 볼만 하였다고 하는데
구슬픈 요령소리에 철없는 새신랑은 어깨춤을 추며 장지까지 따라 가셨다니
두고 두고 철없던 행동이 마음에 걸린다며
어째 내가 그리도 철없이 장난질을 했을꼬 하시며
그 눈 먼 신부의 제사는
아버지 살아생전 청심으로 챙겨 주셨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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