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4월 1일.
8개월 만에 귀국했다.
코로나로 인해2주간의 자가격를 해야하니
사랑하는 손자 준원이의 당부대로
나의 어린 시절 뿌리찾기로
같힌 2주를 유용하게 사용하려고 한다.
나의 성 본향은 인동 장씨
연복군파 24대
정조 개국공신 가문.
윗대 할아버님은 정조시대 개국공신으로 관직에 입관하셨다.
*통덕랑벼슬
*동지중추부사
*영돈영부사
*판중추부사
를 대를 이어 역임하신
훌륭하신 나의 할아버지들...의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남이 자랑스럽다...
위키백과를 통해 알아본 내 조상님들의 관직의 의미를 되세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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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
통덕랑 通德郎 조선시대 문신 정5품 상계(上階)의 품계명.|내용 조선이 건국된 직후인 1392년(태조 1) 7월 문산계가 제정될 때 정5품 상계는 통덕랑, 하계는 통선랑으로 정하여져『경국대전』에 그대로 법제화되었다. 정5품에 해당하는 관직으로는 검상(檢詳)·정랑·지평(持平)·사의(司議)·헌납(獻納)·시독관(侍讀官)·교리(校理... 시대 : 조선 성격 : 관품 유형 : 제도 시행일 : 1392년(태조 1) 7월 분야 : 역사/조선시대사
- 도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태그 조선
*동지 중추부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는 중추부의 종2품 관직이다.
지중추부사, 판중추부사, 영중추부사보다는 낮지만 첨지중추부사보다는 높다. 주로 육조의 참판 및 대사헌, 홍문관·예문관의 양관 제학, 오위도총부의 부총관, 5군영의 대장, 좌우포도대장, 동지의금부사, 각 도의 병마절도사, 각 도의 관찰사, 부윤, 강화·수원·개성·광주의 유수 등을 역임한 관리가 주로 임명되었다.
*영돈영부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는 조선 시대 돈녕부의 장관이었다. 주로 왕의 장인인 국구에게 내리는 벼슬이나 정승을 역임한 사람이 맡기도 했다. 품계는 정1품이었으며, 영돈녕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판중추부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판중추부사는 조선시대 중추부의 종1품 관직으로, 영중추부사보다는 낮지만 지중추부사, 동지중추부사, 첨지중추부사보다는 높다. 종1품 관직을 지낸 재상들, 즉 주로 우찬성과 좌찬성,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사람들이 판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돈녕부..
1414년(태종 14년) 음력 1월 28일에 설치되었다. 종친부에 속하지 않는 왕의 친족을 관리하던 곳으로, 개설 당시에는 왕과 같은 성을 쓰지만 태조의 자손이 아닌 자와 왕실 외척의 사돈 지간, 그리고 왕실의 외손을 관리하는 부서였다[1]. 그러나 처음에는 돈녕부에 속해야 하는 친족의 범위가 명확하게 지정되지 않아 종친부에 있어야 할 이가 돈녕부로 가는 등 갖가지 폐단이 생겨났다. 이를 막기 위해 1437년(세종 19년)에 왕과 같은 성을 쓰는 사람은 왕과 9촌 이상인 친족과 7촌 이상 남매의 남편, 왕과 다른 성을 쓰는 외척의 경우 왕과 7촌 이상인 친척과 5촌 이상 남매의 남편, 왕비와 같은 성을 쓰는 7촌 이상의 친족과 5촌 이상 자매의 남편 및 왕비와 다른 성을 쓰는 5촌 이상 친척과 4촌 질녀 이상의 남편으로 그 범위를 지정하였다.
돈녕부의 수장은 영돈녕부사(또는 돈녕부영사)라 불리었으며, 주로 국구(왕의 장인)나 왕비의 형제들이 그 자리를 맡았다. 품계는 정1품이나 실질적인 권한은 크게 없었으며, 단지 국가에서 정1품에 상당하는 급여와 명예를 보장해주기 위해 국구에게 내려주는 일종의 명예직이었다. 왕비의 아버지나 형제들이 모두 없을 경우에는 전왕의 왕비의 형제 등이 맡기도 하였으며, 그보다 낮은 직제 역시 대부분 왕과 왕비의 친인척이 중심이 되어 역할을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돈녕부에서는 3년에 한 번씩 돈녕부에 해당하는 이들을 직접 조사하고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였으며, 다만 1471년(성종 2년) 이후부터 왕비의 친족은 해당 가문의 대표자가 직접 조사하고 그 명단을 돈녕부에 보고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대한제국 수립 이후 돈녕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유지하였다. 직제의 변동 없이 1910년 일본에 의해 국권이 빼앗길 때까지 계속 존재하면서 왕실의 친인척들을 관리하였으며, 귀족원으로 변경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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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윗대 조상 할아버지 한 분은 조선시대
정조 개국 공신으로
*정 5품 통덕랑의 벼슬에 오르셨고
배필인 할머니 숙부인 창원황씨이다..
관직은 대를 이어 내려 오면서
*종 2품 동지중추부사
*정 1품 영돈영부사
*종 1품 판중추부사
를 역임하신 그시절 당당한 사대부가문의 자손으로 태어난게 자랑스럽다..
호적등본을 떼어 확인한 정보..
나의 증조할아버지 장.보.등.
1912년.8월5일 영면.
부석면 임곡리 634번지
아버지 18살에 작고하셨다.
나의 아버지 장.석.주.
1894년4월 14일 상기 주소에서 출생.
단기.4227년
고종 31년.
명치 27년 출생
1972년 8.14일 대구 봉덕동 에서 작고하심.
나의 어머니 오.옥.성.
1908년 음력 7.17일출생
1927년 결혼.
98세인 2006년 6월28일 작고.
*나는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났고
내 어린시절 족보에 대한 상식이 부족하고 일찍 결혼하였기에
조상님들의 벼슬에는 무심하였는데 아버지 돌아가시고
둘째오빠의 장례때 찾아본 산소에서 발견한 비석에 새긴
비문을 보고 소스라쳐 놀라 온몸이 땅에 얼어붙는줄 알았다.
친정 아버지께서 늘 말씀하시던 뼈대 있는가문...
그 뼈대있는 가문이 이런 엄청난 가문인지는 왜 진즉에 몰랐을까?
나는 해방둥이로 태어났고 6.25를 겪으며 한순간에 몰락해버린 가정에서
곤궁하게 자라났기에 배부르게 밥 한번 먹어보지 못하고 자라
사춘기도 사치라 여기고 살아왔는데 결혼 10년 후에야
내가 진정 양반의 자손이라는 당당함을 맛보게 된게
1991년 둘째오빠 장례식때 산소를 찾아서 본 비석의 비문 덕분이었다.
비석과 상석에 제례음식을 차리며
나의 조상 할아버지들의 오르신 벼슬의 품계..
참으로 놀라운 사실앞에 ..
그토록 조상제사와 산소에 지극정성을 드리던
연로하신 아버지의 굽은등의 기억이 하연한 마음에 눈물짖게한다.
나를 이세상에 좋은 가문에 낳아주심에 감사드린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조상 할아버지 4분은
당시로선 감히 쳐다볼수도 없을만큼
어마어마하고 지체높은 벼슬에 올랐던 양반중의 양반이었다.
그 이후 몇대를 내려 오면서 지금에 이르는 현대까지
아무도 그런 높은 공직에 올라 이름을 떨친 사람이 없음이 한스럽고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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