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이 번창해지고 식구도 불어나 집안에는 활기가 넘쳐나고
아버지는 날마다 사정에서 활을 쏘며 여유롭게 보내셨다.
오매불망 조부모님께 지은죄는 손자들을 안겨드리지 못한것을 후회하며 어찌되었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손을 불려야 한다는게 아버지의 목표였으리라
두 부인이 낳은 첫아들들은 낮으로 자른 탯줄에 염증이 생겨 모두 잃고 그 후로는 태어나는 아기들의 탯줄은 탈 없으라고 아버지가 모두 이빨로 끊으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열한살 나이던 1905년 결혼하여 30년동안의 결혼생활에서 두 부인에게서 얻은 생존 자녀가 아들2 딸3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었던지 어찌되었던 한 살이라도 젊을때 아들을 더 봐야한다고
1936년 반남박씨 3번째 부인을 또 소실로 들여앉혔으니 아들만 내리 삼형제를 낳았으나
역시 큰아들은 병사했다고 한다
내 작은 엄마는 내게 두 오빠를 낳아주었고 마지막 막내로 내가 태어났다.
백여간 큰 집이었으니 망정이지...
세부인을 모두 한집에 거느리고 사셨으니 지금 으로서는 그 누구에게도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하늘이 두쪽나도 불가하다고
용납이 되지않는 일이었지만
지금으로부터 90년전 까마득한 옛날 일이었으니...
자손을 얻기위한 4대독자의 안깐힘이라고 세 부인들도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체념하며 살았을것이다.
세분의 부인들이 낳은 11명의 자식들...
하긴 옛날 아낙들이 혼자서도 십남매는 쑥쑥 잘도 낳았다는데
대를 이을 아들들을 낳았다고 아버지는 참으로 좋아하셨고
자식이라면 아들이던 딸이던 구별없이 귀하게 키우셨단다.
세 부인에게서 순서없이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보는 처자를 집에들여 업어 키우게하고 젓이 모자라는 산모를 대신해 집에서 양을 길러 양젓을 짜서 먹였고
언니 오빠들은 모두 초등학교인 심상소학교에 입학할때는 귀한 자식들이라고 400리길 대구의 양장점에가서 이틀사흘 묵으면서 새비로 양복지로 교복을 맞추고 구두를 맞춰 신겼고
담임 선생님들에게는 이름도 생소한 낙시미깡을 박스채 선물로 보내 자식들의 훈육을 부탁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귀한 자식들인 언니 오빠들은 모두가 예능에 뛰어난 소질이있어 나와 12살이 차이나는 작은 언니는 심상소학교때부터 전국 서예대회에서 1등을 도맡아 하였다는데 85세인 지금도 국전 서예부분에서 대상을 타는 등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계신다.
아버지가 늘 부르던 시조와 단가를 가까이 접해서인지
우리 친정 식구들은 음악적 소질도 빼어난다.
하이얀 버선발로 맵시있게 추시던 학춤도 무형문화제의 솜씨만 못하시랴 반다지의 놋쇠 장석도 아버지 손수 갈고 닦고 쪼아내어
그림같이 이쁘게 만들어 내셨고
활시위 당길때 손가락에 끼는 각지도 암소뿔을 구하여
그리 맨드랍게 만드시던...
안마당에 장대를 세워 몇십가닥의 명주실을 꼬아
蜜을 입혀 튼튼하게 만들던
활시위줄도 인간문화제 못지 않게 훌륭하게 만드시던 분..
미남에다 양반에 인품도 좋고
맵씨나는 비단옷에 내로라하는 대저택의 재산가이던 우리 아버지는 집을 나서면 그리도 인기가 많으셨단다.
지화자 부르던 기생들도 오라버니 오라버니하며 아버지를 가까이하려 애간장을 끓였으며
백여리 안밖에 중앙여관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여서
언니 오빠들 운동회에 참석하시면 단상에 앉은 군수보다 어깨에단 견장이 삐까뻔쩍 빛나던 경찰서장보다 우리 아버지를 먼 발치에서라도 보려고 까치발로 동동 거리던 아낙네들이 그리도 많았다니....
호기롭고 활기차던 중년...
우리 아버지의 빛나던 전성시대가 바로 그 때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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