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14주일 2018.7.8.
1.초여름의 날씨가 이틀동안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선선한 기온과 함께 펼쳐지는 하늘의 장대함과 아름다움, 그속에서 춤추는 듯한 구름의 온갖 형태들, 먼곳에 있는 산들도 손에 잡힐 듯이 가까이 보이는 깨끗함과 청아함등등 기가막힌 자연의 예술품들처럼 느껴집니다.
2.이게 원래 우리나라의 풍광인데 뿌옅게 온산하를 뒤덮고 있는 미세먼지를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3.미세먼지는 온갖 아름다움을 가려 버립니다. 매쾌한 냄세와 함께 불쾌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4.많은 신자분들이 저의 지나온 강론들을 다시 읽어볼 수 없느냐는 요청을 하였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떤 분의 소개로 출판사의 사장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설명과 함께 제가 쓴 몇개의 글을 보내드렸습니다. 그랫더니 뜻하지 않게 그 사장님이 제가 쓴 글들을 책으로 내어야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셨습니다. 저는 책으로 낼 생각은 전혀 없었고, 간략하게 복사본을 만들어 원하는 신자들에게 나눠줄 생각이었는데, 점차 책을 내는 쪽으로 일이 흘러가고 말았습니다. 막상 작업을 해보니 분량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5년동안의 강론을 모아보니 1500페이지가 넘습니다. 많이 줄여서 2-300페이지로 하자고 하였더니 너무 아깝다고 합니다. 그래서 두권으로 책을 내는 것으로 호기를 부리고 말았습니다.
3.요즘 교정작업을 하고 있는데 정말 책을 낸다는 것이 보통일은 아닙니다. 보잘것없는 글들을 책으로 내는 것이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창피하기까지 합니다. 사실 제 글들은 원래 출간을 목적으로 한 글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나온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많은 생각들을 해보게 됩니다. “아! 이 글들은 제가 잘나서 써진 것이 결코 아니구나, 하느님께서 그 세월속에 함께 계셨고, 저를 도구로 삼아 하느님께서 신자들을 사랑하시는 방법이었구나”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게 됩니다. 제 글들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어떤 일을 어떻게 하실지는 조금도 예측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저는 마음을 비울 뿐입니다.
4.추천사가 필요하다고 해서 얼마전에 우리 본당에 오셔서 특강을 해주셨던 예수회의 김병로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그 신부님이 보내오신 글을 읽으면서 저는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그 신부님의 추천사는 이러합니다.
조 신부와의 첫 만남은 까까머리로 입학한 신학교에서였다. 벌써 40년에 가까우니 시간은 참으로 빠르다. 3년을 같이 살고는 서로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깊은 속내를 애기한 것은 바로 얼마 전이었다. 그 만남은 적어도 40년 묵힌 만남이었던 셈이다.
그 만남에서 나는 하느님께서 인간 모두에게 주신 고유함에 믿음으로 충실하게 응답하고자 했던 나의 오랜 벗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도 참으로 큰 반향이 되었다. 왜냐면 나는 그의 고유함을 그 시절에는 썩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까만 얼굴에 하얀 이를 드러내며 밝게 웃는 그런 친구였다. 누구에게나 따뜻하고 밝은 웃음을 지으며, 깊은 정감을 드러내는 그의 목소리의 감겨옴이란……. 하지만 그가 축구를 할 때 보이는 모습은 마치 튼튼한 다리를 지닌 한 마리의 말이 목표를 향해 뛰어가는 폭풍과도 같은……. 그래서 그와 부딪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반드시 그 대가를 육신의 아픔으로 치러야 하는……. 그리고 공 앞에서는 어떠한 자비심도 없는 무시무시한……. 아! 이런 모습들이 어떻게 한 인간 안에 공존할 수 있는지 내내 의아하고 사실 그다지 진솔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 솔직한 나의 느낌이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그가 살아왔던 본당신부로서의 삶을 들으면서 나는 나의 마음 안에 한줄기의 빛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 아! 그랬구나. - 내가 40년 전에 보았던 그의 무자비한 모습은 인간적인 것이라기보다 신앙에 바탕을 둔 영적인 것이었음을.
5.제가 깜짝놀란 이유는 바로 제가 축구를 하던 모습에서 이 친구는 무시무시한 공포를 느꼈고, 그 공포로 인한 선입견과 편견을 무려 40년동안이나 갖고 있었다고 하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축구를 할 때도 “순간 순간 최선을 다하자”라는 저의 좌우명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온 운동장을 누비고 뛰어다녔지만 친구들은 그런 저의 모습속에서 자비가 없는 공포심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아마 아직도 그런 오해와 편견속에서 저를 바라보는 친구들이 많을 것입니다.
6.무려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 오해가 풀렸습니다. 지금에서야 그 친구는 그때 내가 왜 그리도 무식하게 뛰어다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역시 남자들에게 있어서는 마음을 연 한잔의 술이 큰 위력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7.저는 저의 삶을 산 것인데 저의 마음을 알길이 없는 친구들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저의 모습만을 보며, 오해하고 편견을 가질 수 있는것임을 새삼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있어 오해와 편견의 늪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새삼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8.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고향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십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어떻게 저런 기적들이 일어날 수 있을까?”하며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심지어는 벼랑끝으로 몰고가 예수님을 그 아래로 떨어뜨리려고까지 합니다.
9.아마도 동네사람들은 마리아가 결혼을 하기 전에 이미 예수님을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동네는 이웃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숟가락이 몇 개인지까지 다 아는 동네였기 때문입니다. 어떤면에서 마리아는 부정한 여인이고, 그의 아들 예수 역시 부적절한 관계속에서 태어났다는 오해와 편견과 선입견이 머릿속에 가득하였을 것입니다. 아마 성모님도 그런 동네사람들의 분위기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야말로 조용하게 예수님을 키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을 설명할 수도 없었을 것이고, 또 그리 설명한다 해도 동네사람들은 오해만 더 커질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10.성모님은 그야말로 이 세상의, 또 이 세상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속에서 인내와 침묵으로 사실 수 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저 하느님만은 아십니다.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빕니다라고 매일 고통속에 기도를 바칠 수 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명명백백하게 드러날 것임을 믿고 살아가실 수 밖에 없으셨을 것입니다.
11.이 대목에서 성모님의 영성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이 세상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속에서도 하느님만을 믿고 산다는 것은 사실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굳굳하게 견뎌내십니다. 그것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없었다면 그 차갑고 냉혹한 사람들의 시선과 오해와 편견을 이겨나가기 어려우셨을 것입니다. 아마도 하느님께서는 가슴아프시지만 성모님이 평생동안 겪어내셔야 할 고통들을 이겨나갈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위해서 그런 험한 삶의 여정을 허락하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2.하느님의 나라를 당당하게 설파하시며,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기적으로 보여주시는 예수님께 대해서도 동네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면서 신앙의 분노를 느끼고 예수님을 벼랑끝으로 몰고 갑니다.
13.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신앙의 분노, 편견과 선입견의 그 험한 파도를 뚫고 당당하게 그 한 가운데를 지나가십니다. 그분의 권위있는 몸짓에 동네사람들은 움추려들지만 여전히 자신들의 고집과 아집, 그리고 편견과 오해와 선입견을 버리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자라셨던 그 동네에서는 더 이상 하느님의 사랑과 능력을 보여주실 수 없으셨습니다.
14.아름다운 자연이 미세먼지로 그 고유한 아름다움을 보여주지 못하듯이 인간사에도 온갖 오해와 편견, 억측과 선입견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현실이 아닌가 합니다.
15.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의 오해와 편견에 대해 속상해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누구도 내 깊은 마음을 알아주기는 어렵습니다. 또 설명해주기도 어렵습니다. 저도 사제생활을 하면서 저에대한 무시무시하고도, 무지막지한 오해와 편견이 있음을 알고 있고, 또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하느님은 내 깊은 속내를 알고 계신다는 점을 분명하게 믿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내 마음을 알고 계시니 그것으로 “됐다”라고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구름과 같은 이 세상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세상과 사람들은 자기들이 편한대로 느끼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는 존경받지 못한다” 아멘
'당신은복되십니다.향기로운선한목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중 제 16주일강론 (0) | 2018.07.23 |
---|---|
연중 제 15주일 강론 (0) | 2018.07.14 |
연중 제 13주일 2018.7.1. (0) | 2018.07.01 |
연중 제 11주일 2018.6.17. (0) | 2018.06.18 |
연중 제 10주일 2018.6.10. (0) | 2018.06.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