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4월 30일
누가 결혼을 인생의 무덤이라고 했던가?
2006년 1월 16일은 내가 결혼한지 만 41년이 되는 날이다.
참으로 우여 곡절도 많은 반평생이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고
어느덧 반백의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되었다니 참…
그 옛날 …..1965년 1월 16일
무릎이 잠길 만큼 흰 눈이 펑펑 쏱아 졌던 우리들의 결혼식날
그날이 엊그제 일 같이 기억이 생생 하건만
벌써 40 여년이 지났다니 참 세월이 무상함에 실감이 안 난다
그러나 어쩌랴 …
올해 41살의 큰아들의 나이를 속일수 없잔는 가베?
내 고향…경상북도 영주…
하회마을로 유명한 안동과는 지척으로
대대로 유교 사상을 받들어 예의범절에 빼어난 반향인 영주..
그 영주의 가근방 에서 내노라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명성이 자자하던
99칸 대 저택의 소유자인 인동 장씨 석자 주자 가문의
막내딸로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나는
6.25 사변 당시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쓰이던 우리 집이
폭격으로 무너지면서 갑자기 몰락한 집안형편 때문에
한창 자라던 시기에 밥도 배불리 먹지 못할 만큼
곤궁에 빠져 버리게 되었다.
힘들고 궁핍한 생활 이었지만
한살 두살 나이를 먹자
엄하기로 이름난 친정 아버지의 훈육으로
문밖 출입이 자유롭지 못 했지만…
행신 범절이 조신하고 흠 잡을데 없이 야무락진 꿈 많은 처녀로
눈부시게 성장 하였으니
달덩이 같이 환하고 탐스런 얼굴은 부자 집 맏며느리 감이라고들
동네 총각들이 밤잠을 못잘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더라..
후문 ㅎㅎㅎ
동네 아줌마들이 지어준 조금은 촌 시러운 별명…
모란꽃…
또 다시 이름하여 함박꽃
마당 한가운데.,
울타리 옆에..또는 우물가 한 귀퉁이에
탐스럽게 피어난 모란꽃 같다고
모란꽃 처녀로 명성이 자자하던
스므살 소녀시절이 있었으니
내 일생에…지엄하신 아버지 덕분에…
연애 편지라고 단 한번도 받아 보지 못하고..
미처.. 피어나기도 전 꽃봉오리 시절에
나는 그만 팔자 사납게도.
못 되 먹은..
어디서 굴러먹던 개 뼈다귀
아니면 말뼉다귀 인지도 모르는 불한당 에게
보쌈을 당하다 싶게 되고 말았다.
아니 …
이조시대도 아닌 개명천지에
이 무슨 날 벼락이란 말인가?
아니 하필 이면 왜 나란 말인가?
그때의 사연인 즉슨…
그때 내 남편 요한씨는 34살의 노총각으로..
무의촌의 한지의사로 발령을 받아
영주읍네 에서 60리쯤 떨어진 시골
단산면 이란 곳의 공의로 와 있었다.
진료소이자 살림집은 관사는 지금과 달리 전기도 없던 그 시절 ..
밤이면 석유 등잔이나 남포 불을 켜 놓고 살던 어려웠던 시절
군대서 갖 제대한 동생과 두형제가
서툰 솜씨로 의식주를 해결 하고 있었으니
얼마나 고생 인지는 안 봐도 뻔한 사실이다
그리하여
하루빨리 총각탈퇴를 부르짖으며
이쁜 여자가 해주는 따신 밥 먹기를 소원하며
수십군데 선을 보았지만…
천생배필을 만나기가 그리도 쉬운건가?
입에 맞는 떡이 어디 그리 기다리고 있더라고
보는데 마다 마음에 안들기는 서로가 같은 맘이었는지
더러는 퇴짜를 맞고..더러는 퇴짜를 놓기도 하고…
차라리 감나무 밑에 누워서 익은 감 떨어지는걸 기다리는 편이
훨씬 수월 하지 않았을까?
여기 저기 …
얌전한 처자 있다면 무조건 쳐 들어가서 선을 보았건만
마흔 번을 넘게 선을 보았다는데 성사가 되지 않고 있음 에야..
아무래도 내 평생엔 장가 가기가 글렀다고 …
아무래도 노총각 못 면하고 몽달귀신 되겠다고..
한탄에 끌탕을 하며
밤낮으로 술만 푸고 있던 공의선생을 불쌍하게 본 구세주가 있었더니…
이름 하여… 단산이발소 김성배 아저씨…
딱히 갈데도 없는 무의면 에서
어울린다는 기관장들이
지서장이나 면장에 우체국장
하다 못해 신문 지국장에 이발소장?
더러는 어울려 술도 마시고 더러는 시냇가에 천렵도 하고
이래 저래 타관에서 정을 붙이고 살자니
노총각 신세를 못면한 공의를 어째야 장가를 보낼까
모두들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니였었다
그리하여..
천생배필을 만나지 못하고 자꾸만 파토가 나는 노총각이 불쌍한 나머지
궁여지책으로 그리고 위로 차원에서
자기 처제의 앨범을 빌려다가
사진으로 천생 배필감을 골라잡아 보려 하였으니….
아니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하와이 이민자들 사진결혼 이야기를
어디서 주워 들은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앨범을 개봉한 그날이 알고보니 1964년 12월 10일
이발소집 처제와 내 작은 오빠가 결혼을 약속한 사이라
오빠 군입대를 앞두고 셋이서 기념사진을 찍은게 마침 그 앨범에 있었는데…
허구많은 처자들 중에 하필이면 내가 찍혀 버리고 말았으니
이발소 집 아저씨 기절초풍 할 수밖에…
지체높은 집안에
그것도 결혼을 코 앞에 둔 오빠도 있구만
아직도 솜 털이 보송 보송한 꽃봉오리 같은 막내딸 욕심을 내다니..
거기다 나이 차이가 자그마치 열네살…
옛날 같으면 일찍 장가를 가면 나 같은 딸도 있을터 인데….
어불설성 이라며…
천부당 만부당
무한부당의 말씀이라고
미치지 않았으면,,,본정신이 아니라 카며
다른 처자 골라 잡자고 아무리 애원을 해도..
이미 눈이 뒤집히고 간이 배 밖에 나온 공의선생
나는 이 처자 한테 꼭 장가 가야 된다꼬 해싸며
떡 줄 사람 꿈도 안 꾸는데 김치국 부터 벌컥벌컥…마시는
대 사건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이건 말이 통 하지 않는게..
말리면 말릴수록 미친듯이 날뛰었으니….
남이 보기에 참 가관 이였다더라…
그리하여 용감하고 무쌍한 공의선생..
자기 나이와 행색 등 주제 파악도 하지 못한체
옳다구나 이제서야 임자 만났다 하며
나는 이런 처자 한테 장가 갈라꼬
지금껏 기다렸다 카이… 를 부르짖었으니
재수없게 걸린 것이 바로 나…
이름하며 모란꽃 처자 였으니…
그리로 부터 내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노총각 공의선생은 불철주야를 가리지 않고
눈이 쌓여 버스도 끓어진 60리 산골길을
구두에다 새끼줄을 칭칭 동여메고
매일 같이 걸어서 우리집 앞에 진을 치고 있었으니
웬 사람이 저리 우리집 문앞에서 진을 치고 있을꼬?
궁금증을 못견딘 언니들이 괴청년을 붙들고
사연을 물어본 것이 불상사 였다.
여차여차 해서 저차저차 하게 되었다고….
그 말을 들은 언니 셋은 합동으로 감격들을 해 가지고 설랑…
그 성의가 가상타꼬 …
요즘 세상에 로미오와 쥴리엣이 따로 엄따꼬 하믄서리
자꾸만 자꾸만 어린 동생한테
괜찬은 사람이니 어서 시집 가라고 꼬시는 거였다
니가 ..아직 나이가 어려서 몰라 그렇지..
저리 좋은 자리가 어디에 또 있을까?
남자가 뭐 인물 먹고 사는것도 아니고
돈 잘벌면 그만 인게라
직업도 그렇지 한의사에다 한지의사 자격증 까지 있다니
무의면에 공의면 월급도 많겠다 그게 어디노?…
니는…아주 호박이 넝쿨째 떨어 졌구만…
나 같으면 두말 하면 잔소리제 얼릉 시집 가 삐리겠다꼬….
그리 좋으면 언니들이 가지 왜 싫다는 나 보고 그러느냐며
저렇게 늙은 아저씨가?
아이구 세상에 날강도가 따로없다…
미처도 분수가 있게 좀 미쳐라 …
나는 진짜 공의 선생 인지 나발인지 꼴도 보기 싫었다.
언니들의 솔깃한 호기심에 용기 백배한 공의선생…
짜장면이다 냉면이다 온갖 수발 들어주며
제발 제발 동생 맘좀 돌려 달라고 애걸 복걸…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꽹과리 치고…
어떤 말 에도 콧방귀만 뀌는 모란꽃 처자 때문에
울다가 웃다가 성 내다가 복장거리를 안 하나?
아무리 애를 쓰고 생때를 쓰다 까물어 친다해도…
스무살 모란꽃 처자인 내 눈에는
니가 ..아니 아저씨가 아무리 그래봐야 안된다니까?
생기기는 베트콩 찜쪄먹게 생겨 가지구설랑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난리를 치는거야?
언니들 한테 아무리 손바닥 비벼봐야 소용 없단걸 아직도 모른는가베
흥 아무리 그래 봐라 나는 시집 안간다.
어림 반 푼어치 없는 개 수작 하지도 마라
자기 자신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거울도 안보고 사나?
어디서 언감생심 나한테 장가를 오고 싶다고
흥 .아나 장가? 여기 있다.
공의선생이 미친 듯이 날 뛰는 것과 비례하여 내 마음은
얼음짱 처럼 꽁꽁 얼어 붙어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리 애를 쓰고 협박을 해도
왼 눈 하나 깜짝 않는 나를 보고
앞 발 뒷발 다 든 공의선생…
하다 하다 안되니까 마지막으로
파카 속에다 야전도끼를 품고 찾아 왔으니..
아니 누굴 협박 하는거야 뭐야??
그런다고 눈도 깜짝 않는 나와는 상대를 접은체
덮어 놓고 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쳐 들어 와가지곤
도끼를 쓱 꺼내들고 우리집 대청 마루의 상 기둥을 찍겠다나?
아니 누구 맘대로?
아니 자기집도 아닌 생면부지 남의집의 기둥을 찍어?
놀라서 기절 직전이 아버지께서
대관절 무슨일로 …
그리고 도대체 젊은이가 누구이길래
이 따위 천하의 불쌍놈 같은 행패를 부리느냐고
호령을 하셨다.
이때다 싶었는지 그런 기회를 노렸던지
넙죽 엎드려 절하면서..
자기는 이러 저러한 사람이며 …
여차 여차 해서 댁의 따님 사진을 보고 이렇게 염체 불구 하고..
천하의 불 쌍놈의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고…
아니 자기가 뭐 최 진사 댁 찾아온 삼돌인 줄 알았었나?
자초지종을 들어 보신 아버지께서
그래도 그렇지…
이런 행동은 천부당 만부당한 행동이라며
아직 나이도 어린 딸을 시집 이란건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어디서 이렇게 깡패 처럼…불한당 처럼..
남의 집에 쳐 들어 와서 못된 짓 이냐고
썩 물러 나라고 호령호령 하셨겠다
그러구러 간신히 쫒아 낸지 이틀이 지나지 않아
집으로 다시 찾아온 천하에 불한당 하고도
깡패 오야붕 같은 공의선생
삼으로 꼰 새끼줄을 한 뭉치 둘러메고 와서
우리집 대문에다 목 매달고 죽는다고
동네 방네 떠나가라 엄포를 놓는 바람에..
양반이신 우리 친정 아버지
그제서야 심각해진 형편을 아시고
아니 저놈이 명색이 의사란 놈이
저놈이 미쳐도 지성으로 미친게 아닌가보다.
아닌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벌건 대 낮에 남의 집에 와서 되지도 않는 행패를 부리다니
천하에 불한당 같은 놈 ..하고 아무리 호령을 해봤지만
대문에다 새끼줄을 걸고 목을 들이미는 대야 어쩌 하겠는가?
지금 같으면 경찰서에 신고라도 하지
그 시절 그때는 그런 일방적인 행패에도 속수무책..
그저 동네사람 알게 될까봐 오히려 전전긍긍.
흡사 무슨 큰 죄라도 지은양
우리 식구들은 벌벌 떨고만 있었으니 참…
아이구 이제 우리집안 다 망했다.
어디서 굴러먹던 개 뼈다귀 인지도 모르는 놈이
우리집 대문에다 목을메고 죽어 자빠진다니
집안이 망해도 유분수지 이일을 우짤꼬 ?
이제 동네방네에…
어떤놈이 우리 대문에다 목메 달았단 소문이나면…
우리딸 신세 망치는건 시간문제고
앞으로 어느놈이 우리딸 델고 가겠노?
사색이 다 되서 부들부들 떠시다가 앓아 누우신 우리 아버지
엄포도 호령도..통사정에도
막무가내로 장가 오겠다고 행패를 부려대는 불한당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공의라고…
완전 생짜배기 숫총각이라고 벅벅 우겨대니까…
그 나이에 설마 총각 이기는 한가?
아니면…혹시 미친놈?
아니 혹시 사기꾼은 아닌가?
식구들이 둘러 앉아 대책회의 라고 해 본다지만
뾰족한 해결책도 없었고
고민하는 기색을 알았던지..
공의선생 스스로 신원조회 서류를 들고 오지를 않나 참…
저 놈이 장가들고 싶어 환장을 한건가???
그리하여 우리 식구들은 신원 조회가 가짜는 아닌가
마침 경찰서 사찰계에 근무하던 큰형부의 도움을 받아
다시 한번 조회를 해 보았다.
마침 그 나이에 아직도 미혼임이 확실 하단걸 알고난후
아버지께서는 이대로 밍기적 거리다간 큰 낭패 당하겠다고 생각 하셨는지
문밖에 석고대죄 하듯 널부러져 있는 공의 선생을 불러 들였겠다.
그래 侍下 신가?
네~~이~~~ 그러하옵니다.
(아주 신바람이 났습니다)
그럼 춘부장께서는 무슨 일을 하시는고?
아 예…..
보은 근처에 있는 XX광산에 소장직을 맞고 계십니다.
새빨간 거짓말..
아하…그럼 살림은 여부한 편이신가?
아 예~~ 그러하온줄 아옵니다.
아주 사기꾼이 따로없다
아하 그래? 그럼 지금 양친께서는 어디에 살고 계시는고?
아 예…지금 부모님께서 막내 동생의 교육문제로
대전에서 생활 하시고 계십니다.
아하 그래? 그럼 집은 지니고 사시는고?
아예 그렇구 말굽죠
대전시 은행동 30번지가 저희 양친 계시는 주소이고
거기 서외과 라고 3층 건물이 저희 본가이 옵니다.
예…조사를 해 보시면 금방 아시겠지만 예…
아하 그래?
자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게 무지막지한 불상놈의 집 자제도 아닌 것 같구만 …
그래…아무리 장가를 들고 싶다지만 이런식으로 하면 되겠는고?
아이구 예 죄송 하옵니다
오죽하면 제가 이런짓을 했겠습니까?
제발 저를 살려 주십시오
제가 신원도 확실하고 직업도 확실하니..
따님을 제게 맡겨만 주신다면
일평생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 줄 것은 물론이거니와
처가집에 죽을 때 까지 말뚝에다 절하는건 두번째 문제고…
처갓집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어쩌구 저쩌구….
그럼 한가지…
술 담배는 하는가?
아 예…술이란 아예 밀밭 근처에도 못 가구요…
담배는 벌써부터 끓을 려고 하고 있습니다.
음…하긴 술이던 담배던 먹는 음식 이지만
어느것 이던 과하면 실수하고 몸을 망치는 것이니 명심하고…
이리하여 ..
신명을 바쳐 효도 하겠다는
공의선생의 감언이설에 속은 아버지께서는
딸의 의사는 일언반구 물어 보지도 않으시고
나이 차이는 좀 있지만 직업도 든든하고…
우선 목 매달아 죽어서 송장 치기 전에
동네방네에 흉측한 소문 퍼지기 전에
시집 보내 버리는게 상책 이라고 생각하신 것인지
그 베트콩 찜 쪄먹게 생긴
깡패요 사기꾼이요 천하에 나쁜놈인 공의선생 한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막내 딸래미를 덜컥…
맡기기로 결정을 해버렸다네
에구 내 팔짜야…
.
공의선생이 치밀하게 짠 계획대로
작전개시 열흘 동안 줄기차게 공갈 협박한 결과…
드디어 1964년 12월 30일..
마침 집에 큰일이 있어
대소가 에서 다 모인 어른들과 상의를 하신끝에
그래 니가 그리 지성으로 바라고 원하니..
내딸을 데려 가면 일평생 사랑하고 보살펴 주그라…
하는 말씀이 떨어지자 말자
너무 기쁜 나머지 공의선생 …
우리 친정 아버지께 달려들어 키스 세례를 퍼붓는 바람에
뒤로 넘어진 아버지 하마터면 뇌진탕 걸릴 뻔 하셨다.
그렇게 어렵사니 결혼을 허락받은 날부터
공의진료소는 아예 닫아 걸고
매일 같이 60리 길을 걸어서 출근…
또다시 줄기차게 졸르고 졸라
보름후..
그러니까 1965년 1월 16일
음력으로 섣달 열 나흗날..
해가 가기 전에 결혼을 해야지
새해가 되면 삼재가 들어 결혼 못한다고…
조상 중에 장가 못가 죽은 몽달 귀신이 있었는지
안달복달 하루빨리 결혼식 올려야 한다고 아예 들어 눕질 않나….
어쨌던..
번개 불에 콩 구워 먹듯이 벼락치기로
결혼식을 밀어 부치고 말았으니 참…
그날 …
시집 이란걸 가기도 싫고 꼴도 보기 싫어 죽겠지만…
그랬다간 아버지 아시고 집안 망칠 년 이라고
다리 몽뎅이 부러지는 불상사가 생길까봐
할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아버지 분부를 따르게 되었던 것이었다
에 고…
결혼식 날은 아침부터 웬 눈은 그리도 쏟아 붓던지
드레스를 입고 신부화장을 마친 나는
이층 계단으로 해서 예식장에 올라 간다는 것이
그만…
계단 옆에 붙어 있는 이발소 문을 열고 들어 갔으니
때 마침 하이칼라 머리를 매만지던 새신랑이 보고서
엉겁결에 벌떡 일어나 90도로다 열 번은 넘게 절을 했었지 아마???
그리하여 친지들과 하객들의 축복 속에 무사히 결혼식을 마치고
갓을 쓰시고 도포까지 입으신 친정 아버지와 시부모님..
수를 셀수 없을 만큼 우굴우굴한 우리 친정 일가 친척들과도 또 한판
신랑 하객으로 줄줄이 따라온 50대 중반의 면내 유지들과…
방년 21세의 꽃 같은 신부 친구들과의 기념 사진도 찍었겠다.
시댁 식구라곤…
시아버님과 시어머님 딱 두분이서
큰 아들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멀리 대전에서 오셔서
큰아들 장가 간단 소식에 굴뚝 뒤에 가서 춤까지 추셨다고 말씀해 주셨다
하긴 다섯살 터울로 아들만 5형제인 집안에 맏이가 35살이 되도록 장가를
못들었으니 바로 밑에 동생이 30살이요 셋째 시동생이 25살
아주 줄줄이 사탕으로 기다리고 있었으니 얼마나 화급한 상황이 었을까
행패 부리고도 남았을 것 같다.
무릎이 빠질 만큼 눈은 왔지만
결혼식도 무사히 끝나고 피로연도 분수에 맞지 않을 만큼 호화롭게
끝내고 나니 겨울이라 4시가 넘으니 벌써 어스름이 깔려왔다
그 가난하던 시절 우리에겐 신혼여행 이란 꿈 같은 이야기 이고
한시 바삐 단산면으로…
아니 공의진료소로 돌아 가야 했으니
트럭을 한대를 빌려 이불이며 신혼 살림살이를 싣고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시부모님이 택시 한대를 불러서 타고 갔고
그리고 상객 으로는 작은 오빠가 따라 가게 되었다.
어쨌던 그렇게 애걸 복걸 하던 결혼식이 끝나자
신랑은 얼마나 기뻤던지…
아니면 실수로 술독에 빠졌던지
좌우 양단간에
택시에 탈 때부터 보아하니 인사불성에 빠진 것 같았다.
술을 못먹는다는 말이 맞기는 맞는갚네
얼마를 퍼 먹였기에 저리 되었을꼬?
술이라면 삼만리를 도망 가는 나는 곁눈질로 신랑을 훔쳐 보았다.
우리를 실은 택시는 눈 쌓인 시골길을
이리비틀 저리비틀 미끌어 지며
어둠에 쌓인 산골길을 끝도 없이 달려간다.
아직도 이런 동네가 다 있는가?
전깃불도 없다는데 캄캄해서 어찌살지?
그리고 화장실은 멀리 바깥에 떨어져 있다는데 무서워서 어떻게 가지?
머리속은 자꾸만 복잡해 지고
내 눈은 어느틈에 술에 취해 고개를 떨군
신랑이란 사람한테 고정되고 있었다
미끄러운 눈길을 거의 두시간을 달려..
드디어 공의 진료소란 나무현판이 붙은 오두막 앞에 차가 멈춰섰다
진료소 앞엔 결혼식에 참석 못한 동네 사람들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색시를 데리고 오나 하고
장사진으로 둘러선 사람들은 까치발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이 먼저 내리시고..
신랑이 내려야 하는데 인사불성 …
아예 숨소리도 멎었는지 …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셋째 시동생이 아무리 끄집에 당겨도 끄떡도 없다.
나중엔 동네 아줌마들 까지 합세해서 짐짝처럼 잡아 땡긴 나머지
철퍼덕~
소리도 요란하게 눈쌓인 진료소 앞마당에다가
겨우 겨우 새신랑을 끌어 내리는데 성공…
새색시?
나는 내발로 내렸다.
동네 사람들의 호기심에 찬 수 백개의 눈 들이 뚫어져라 쳐다 보는 가운데..
가엾은 신랑은 개 끌리듯 진료소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녹의홍상을 입은 어여쁜 새색시인 나도 사뿐 안으로 들어갔다
병원으로 쓰는 마루 깔린 진료실을 지나..
안방 이라고 이름 하는 곳에 들어가보니
끌려들어온 새신랑은 윗목에 널브러져있고
호롱불에다 남포까지 밝힌 안방은..
미닫이 문 이란게 창살이란 간데 없고
철사로 얼기설기 엮어 창호지를 바른 것이 어설프기 그지 없었다.
아니…창살도 없이 철사로 얽은 곳에 어떻게 창호지가 붙어 있지?
새색시인 나는 그게 그렇게 궁금 할 수 없었다.
우리집 방문엔 언제나 가을이면
코스모스나 국화 같은 꽃을 말려 창호지로 두번 발라
아련히 비치는 꽃무늬가 그렇게 이쁠수가 없구만…
이곳이 정녕 감옥도 아닐진데…
창살대신 철사줄로 문도 만들수 있나?
눈은 윗목에 쓰러진 신랑한테 가 있었지만
머리속은 미닫이 문 때문에 자꾸만 궁금증은 더해만 갔다.
한참을 지나 부엌 쪽의 문이 녹크도 없이 스르르 열리더니만
개다리 소반 하나를 쑤욱 들이 미는게 아닌가?
아니 ..이걸 내가 받아야 하는건가?
그래도 내가 새색씨 인데
받을까 말까 망서린는 찰라
옆문을 열고 시어머니께서 들어 오시더니
상을 받아 내 앞에 놓아 주셨다.
아가 배 고플 터이니 어서 많이 먹거라
세상에나…
시집와서 처음 받은 밥상엔….
평생 구경도 못해 봤을 성 싶은 불어터진 떡국 한 그릇과
간장 한 종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니 이게 뭐야?
진짜 말로만 듣던 개다리 소반이란거 아냐?
세상에 그런데 새색씨 한테 웬 떡국인고?
아니 ..우리 친정집 보니까 새색씨 오는날 큰 상차림 에다
대반 이라고 그 동네에서 복이 많고 첫아들 낳은
부자집 마나님과 겸상을 차려 주던데
아니??? 설마???
손바닥 만큼이나 퉁퉁 불어 터진 떡국을
새색시인 나보고 먹으라고 준단 말인가?
시집오는 첫날부터 간이 덜컥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두 하두 …
지켜앉아 먹어야 한다는 시어머님의 성화에 두어 숫가락을 뜨는 찰라
윗목에 쓰러졌던 새신랑 벌떡 일어 나더니
고래 고래… 천정이 무너져라 소리를 질러 덴다.
빨리 자야 하니까 이불 깔아 놓으라고..
세상에…
이제 6시 밖에 안되었구만
아니 저렇게 자고 싶어 안달 복달하며 고래 고래 소리를 질러야 할까?
아니 세상에 뭐 저런 인간이 다 있지???
그 꼴을 쳐다 보고 앉았을 라니 참 기도 안 막히는 거였다.
아무리 자고 싶어도 시어른들 한테 폐백은 먼저 드려야 한다고
어머님이 한참을 설득하자
빨리 절하자고 혼자서 어머니께 절을 꾸벅꾸벅 하지를 않나?
어머님도 무안 하셨던지 얘가 왜 이리 안하던 짓을 하냐고..
시동생을 불러 옆방으로 새신랑을 질질질 끌고 가셨다.
상객으로 따라온 친정 오빠가 이웃집에서 저녁을 마치고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고 나를 보러 왔다.
나이가 스물네살인 오빠는
시부모님 앞에 절을 올리고…
동생이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하게 되어
시댁에서 행 해야할 예절도 미처 배우지 못했노라고…
그래도 삼종지덕을 배운 동생이니
앞으로 서씨 가문에 좋은 며느리가 될수 있도록
잘 가르키고 보살펴 달란 말을 할땐 그렇게 눈물이 날수 없었다
그 소리를 듣고 눈물만 흘리는 내가 보시기에 딱했던지
시부모님께서 오누이 간에 이야기 나누라고 자리를 비켜 주셨다.
오빠는 이제 여기서 너를 보면…
네가 친정 오기 전엔 다시 못 만난다고
상기된 얼굴로 내게 물었다.
매제가 아까 보니까 술이 좀 과 한 것 같던데
너를 혼자두고 대체 어디 있느냐고… 묻는 순간
나는 시계며 가락지며 결혼예물을 손수건에 쌓놓고
저런 인간과는 한시도 못살겠으니
오빠 빨리 택시 불러서 타고 우리집 가자고 …
엉엉엉 울어 버렸다.
난감한 오빠는 이제는 네가 시집을 왔으니
이 시간부터 이집 귀신이 되어야 한다고…
지금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가 혼절 하실 것은 물론이거니와
동네 우사스러워서 어떻게 사냐고
아마 매제가 그토록 소원하던 너를 데리고 오니까
너무 좋아서 그런 거니까 네가 이해 하라고….
아니 이해 할게 따로있지
나는 술먹는 사람 원수 같이 생각하는데
술 못먹는다고 거짓말로 속이고 아주 고주 망태잖어 지금 보니까
나는 한시도 저런 사람과는 못사니까 맞아 죽어도 집에 갈 꺼야
아버지도 내말 들어 보시면 이해 하실꺼라고 아무리 우겨도
오빠는 아버지는 이해 하신다지만 대소가엔 무슨말로 이해를 시키느냐고
다…니 팔자라고 생각하고 잘 참고 살라고 하더니
붙잡고 우는 나를 뿌리치고 마치 도망치듯 방을 빠져 나가버렸다
이리하여 나는 안방에서
새 신랑은 시동생과 시부모님과 네명 이서 옆방에서…
첫날밤을 뜬눈으로 맞이 하게 되었으니…
이것이야 말로 파란만장한 내 결혼생활의 전주곡이 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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