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원이 만세 3
우리 새언니는 정말로 착한 여자다.
시집와서 지금까지 한번도 얼굴 붉히거나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었었는데..
내가 대과거형을 쓰는 이유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는 뜻이다.
물론 큰오빠나 우리 부모님,나에게는 더 할수 없이 사근사근한데,
이젠 준원이가 어느덧 초등학교 4학년이다 보니,여기저기 과외 데리고 다니고,
숙제 도와주고 하면서 성질을 버렸다.
어쨌든 준원이가 애기 였을 때는 아직도 새댁 티를 못 벗은 수줍은 애기엄마였다.
아기 낳고 몸조리만 하면 바로 일을 시작하겠다고 했던 것이,
아기가 너무 예쁘다고 계속 집에서 뭉기적거리면서 아까운 인력을 낭비하고 있었다.
새언니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이자 미용기술도 가지고 있어서
,내게는 정말 호박이 덩굴째 굴어 들어온 격이었다.
내가 가끔 연주가 있으면 언니가 전날부터 여러가지 크림으로 얼굴 마사지를 해주고,
당일에는 내 머리에 중전마마같이 뜨거운 롤을 잔뜩 달아놓고는
정성들여 색조화장에다 인조 속눈썹까지 달아주고,
마지막으로 머리까지 손질해 주곤했다.
나 뿐만 아니라 2주일에 한번 꼴로 머리를 바싹 치켜 깎는 우리 큰오빠에게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지,괜히 엄한 미용사한테 집 한채와 맞먹는 돈을 언니 때문에
오빠는 고스란히 아낀 셈이다,그렇다고 언니한테 돈 주는건 한번도 못봤지만.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잠깐 우리 새언니에 대해서 알아보자.
새언니는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사람이다,
어찌나 무던한지 우습다고 크게 웃지도 않고,
노엽다고 크게 화내지도 않고,그저 얌전하고 조용하고,딱 맡며느리 감이다.
큰오빠가 대학때 미팅으로 만났다는데,그 미팅이란 것이 딸기밭 미팅이었단다.
더군다나 남성쪽 리더와 여성쪽 리더가 미리 머리 쪽수를 맞추고 해서 만난게 아니라,
오빠랑 친구들이 초여름에 딸기밭에 놀러갔다가
[남자들끼리 딸기밭으로 놀러 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난 경악을 금할수 없었다]
근처에서 딸기파티를 벌이고 있는 언니와 친구들을 보고
합석을 했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단다.
우리 큰오빠는 그야말로 양반이다,
말수도 별로 없고 –한번씩 입을 열면 상상을 초월하는 코메디를 하긴 하지만-
내 바로 위의 작은오빠나 내게나 항상 “큰”오빠 역할을 톡톡히 해서,
내 어리광을 다 받아주다가도 어느 선에서는 눈물이 쑥 빠지게 혼구멍을 내곤했다.
그런 오빠가 딸기밭에서 언니를 어떻게 꼬셨을까 생각하면 너무 우습기만 했다.
언니는 당시에 꽤 잘 나갔던 것 같다.
우연히 오빠와 연애할 때 찍은 사진첩을 본 적이 있는데
사진 속의 언니는 수퍼 초미니 스커트를 입고,
큰 키인데도 한 길은 되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다.
오빠와 언니는 꽤 오랫동안 연애를 했는데
,막상 오빠가 조심스럽게 결혼얘기를 꺼냈을 때 엄마의 대답은 “…..” 없었다.
가끔씩 오빠가 언니에 대해 스쳐 지나가듯 이야기 한 것을
엄마 머리속에서는 이미 정리가 되어서 그래프와 함께 소수점 단위까지 수치를 뽑아서
“결혼용납이 안되는 이유에 관한 리포트” 가 작성이 되어 있었다.
뭐 별거 없었다…..단촐한 가정에서 자랐다는 것이
첫번째 이유고 두번째 이유고 세번째 이유였다.
엄마 의견도 아주 틀린건 아니었다.
우리 집은 아버지가 장남인데다 위로 고모 한분 밑으로 작은아버지 네분이 계신다
거기다가 종가집이어서 설,추석명절 말고도 제사가 평균 한달에 한번 꼴로 다가오고,
특히 음력 7월달엔 1주일에 한번씩 제사와 가족모임이 번갈아 돌아와서
우리엄마는 일반 사람들이 무슨일이 징글징글하게 싫어질 때 하는
“…얼어죽을…” 이란 표현을
“디어죽을”이라고 할 정도다.
그 정도로 한 여름의 제사 모시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우린 천주교 신자라서 교회법 대로라면 조상을 위하는 제사를 모실 수는 있어도,
제사가 끝난 후에 음식을 덜어서 문 밖에 놓아두는 행위는 하면 안되었는데,
아직까지 유교관념이 강한 아버지는 “정석”대로 제사를 모시고,
그 대신 제사가 끝나면 통상적으로 성당 친구분들이 오셔서
제사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 상례가 되었다.
따라서 제사가 가족모임으로 끝나는 적이 별로 없고
동네잔치로 이어지는게 통례가 되었다.
새언니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부모님과 떨어져서 조부모님 밑에서 컸는데,
조부모님 모두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제사문화랑은 너무나 동 떨어진 가정에서 성장했다.
우리 서씨집에 시집와서 30년간 제사를 모시면서 손마디가 굵어진 엄마로서는
당연히 걱정도 될 만했다.
음식이야 가르치면 된다지만 완전 다른 문화는 극복하기 힘들고,
식구들이 많아서 부대끼기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사랑받고 사랑해 주면서 커야지
남들에게 사랑을 베풀줄도 안다는 게 엄마의 이론이었다.
“어머니,일단 한번 만나보세요.좋은 여자예요”
“연애랑 결혼은 틀리다”
엄마랑 오빠는 몇번 실랑이를 하다가 엄마가 너무 완고하니까
오빠는 그 이후로 더 이상 언니이야길 꺼내지 않았다.
오빠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여기저기서 선도 들어오고 했는데,
엄마가 오빠에게 슬그머니 예쁜 아가씨들 명함판 사진들을 내밀 때 마다
이번엔 오빠가 묵묵부답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서 오빠가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어머니,그 여자 너무 착해요.그냥 한번만 만나보세요..
보시고 어머니가 그래도 맘에 안드신다고 하시면,그 땐 선 보겠습니다”
“……”
오빠가 거의 포기하려는 순간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걔 시간 괜챦으면 모레쯤 우리집에서 저녁이나 먹자구 해라”
오홋,대단한 양보였다.
우리 아버진 대단한 경처가
(아내를 존경한다는 뜻이다,아내를 보면 경기를 한다는게 아니고)
라서 왠만한 결정은 엄마가 먼저 하시고 아버지는 엄마 뜻에 대부분 동의하시고,
정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저~ 머시기~ 좀 거시기한데~~” 하신다.
난 머시기는 뭘 의미하며 거시기는 뭘까 항상 궁금하지만 엄마는 척 알아듣는다.
그럼 아버지와 절충해서 두 분이 원하는 쪽으로 해결을 하신다.
가끔 아버지가 물 밑 작업으로 엄마 옷을 사주던가 하면서
지갑을 열어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그 정도의 일,큰 아들의 여자친구를 초대 하는 일 정도는
엄마 선에서 가볍게 허락이 떨어지고,드디어 그 “모레”가 왔다.
말로는 된장찌개나 끓여서 밥 먹자고 해놓고는 엄마는 아침부터 나섰다.
“엄마 어디가?”
“어..저기 시장에..뭐 먹을 게 아무것도 없네.”
“된장끓인대면서…서로 부담 안되게 된장이나 놓고 밥 먹재며..”
“에이 말이 그렇지,요즘 애들이 어디 된장 잘 먹는다던?
더군다나 백화점 명품 매장에서 일한다던데,
그런 사람이 원 우리집 음식이 입에 맞기나 할래는지 원…”
난 요즘 애들 아니고 그럼 조선시대 여잔가?
그리고 난 집에서 빈둥대니까 우리집 된장 먹어도 되고,
명품매장에서 일하면 된장말고 금장먹어야 한다는 말인가?
칫,아무리 그래도 우리집 된장 먹어보면
밥그릇이 뚫어져라 수저로 닥닥 긁어먹지 않곤 못 배길걸?
난 엄마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를 너무 좋아한다.
물론 집에서 담근 메주로 띄운 청정된장인데다
양파 반개를 뚝뚝 썰고,청량고추를 송송 다져놓고
,쇠고기도 잘게 썰고,두부 반모쯤 깍뚝썰어 넣고 고춧가루 조금 풀고
바글바글 오래오래 끓여놓으면 맨 밑에 깔려있는 무우를 뒤져서 먹는 맛도 일품인데다,
그 다음 날쯤 식은 된장을 다시 한번 바글바글 끓여서
호박잎을 쪄내서 찬밥을 척 올리고 숟가락으로 고추장을 쓱 묻혀서 밥 위에 한번 발라주고,
그 위에 빠글이 된장을 살짝 끼얹어서 입이 미어져라 먹는 호박잎 쌈은 정말 죽여준다.
“아니,뭐 그래도 아들이 생전처음 여자를 집에 데려온대는데,
된장만 내놓을 수가 있나..뭐 불고기라도 좀 굽고,겉절이도 빨갛게 새로 무쳐내야지,
지금 시어빠진 김치밖에 없다.”
“어,나도 그럼 같이 가”
오랜 내 생활이다 엄마따라 시장 가는 건.
내가 국민학교 때부터 (난 초등학교 세대가 아니다) 엄마 치마꼬리 붙잡고 시장을 �아다녔고
그때 엄만 우리 호랑이 할아버지 밑에서 좀 고된 시집살이를 하셨는데,
콩나물 값을 깍아서 잔돈이 좀 남으면 내게 풍선껌을 사주기도 했었다.
물론 애들 위해받쳐서 키우면 망하는 자식농사라고
모든 간식을 금지시킨 할아버지 때문에 집에 도착하기 전에 얼른 단물을 빨아먹고
엄마한테 풍선 몇번 불어서 보여주고는 얼른 뱉아내야 했지만,
지금은 모든게 너무나 예쁜 추억들이다.
내 고향 남쪽 바다…..가 아니라 내 고향 금남시장 이다.
난 금호동에서 태어나서 금호동에서 자란 토박이다.
엄마따라 시장가면 생선가게 아줌마부터 과일가게 건어물가게 아줌마 다 아는체 한다.
금남시장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하신 분들인지
새로 갓 장사를 시작하신 분들인지는 금방 구분이 된다.
오래 계신 분들은 내게 아직도 아이 취급을 하시고
새로 시작하신 분들은 날 아가씨 취급하기 때문이다.
“사모님 나왔어? 여기 전감 떠놨어” 강산한의원 사모님이라고 부르더니
이제 그것도 줄어서 그냥 사모님이라 부르고 “요”자는 어디다 떨이 주셨는지
반말도 아닌 경어도 아닌 이상한 나라 말이다. “전? 제사도 아닌데 왠 전?”
“젊은 애가 서울서 혼자 자취하면 손 많이 가는 음식은 잘 못억었을거 아냐..”
동태 전감을 떠달라고 미리 전화를 넣어뒀는지 아줌마는 미리 싸둔 생선을 내어주고
또 주섬주섬 굴이며 깐새우며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내가 엄마를 쳐다보면서 저건 뭐할려구?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엉,해물파전이나 할까하고”아이고 잔치났네 잔치났어.
물론 된장도 끓였지만 불고기에 전에 동그랑땡에 파전에..
정말 상다리가 부러져라 상을 봤다.물론 엄마의 도우미는 내 역할이었구.
난 엄마 일손을 돕는 내내 궁시렁 거렸다.
“아휴,누군 좋겠다,남자친구 엄마가 밥해 먹이겠다고 여동생까지 일을 부리고.
.나도 꼭 여동생 있는 남자랑 연애해야지..”
그 날 엄마가 나를 얼마나 일을 시켰던지 허리 한번 제대로 못펴고 있다가
어느덧 오빠의 곧 들어올거라는 전화를 받았다.
엄마와 나는 마루에 부랴부랴 제사때 쓰는 큰 상을 펴놓고 은수저며 방석이며
손님맞이에 정신을 못차렸다.
그 와중에서도 엄마는 완전히 거미손이었다.
팔이 몇 개나 더 달린 듯이 금방 나랑 상을 보면서도,찌개 간을 맞추는가 싶더니만,
어느새 옥상의 항아리에서 장아찌를 덜어내어 오고,
녹음기를 틀어놓았는지 끊임없이 통통통 하는 도마질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오빠와 새언니 등장.
새언니는 커다란 대나무 바구니에 갖은 과일을 하나씩 한지로 싸서 들고 있었다.
물론 집 앞까지는 오빠가 들고 왔겠지만 말이다.
지금 생각하니 오빠가 사 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언니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생머리가 치렁치렁하고 크림색 투피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얼굴 생김새는 차분하니 배우
우리 부모님께 공손하게 인사를 드리고
,어색하게 몇마디 말들이 오고 가다가 우리는 식사를 시작했다.
손님이니까 언니는 오빠 옆에 다소곳이 앉아서 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누고,
엄마와 내가 뜨거운 음식들을 차례로 내어왔는데 부엌에서 엄마한테 물었다.
“엄마 어때? 첫인상 좋다”
“글�.. 명품 매장에서 일 한다길래 겉멋만 들고 화려할 줄 알았더니,얘가 얌전해 뵈네..”
일단 그 정도면 시작이 좋았다.
엄마는 새언니가 첫 눈에 맘에 들었는지,밥도 꾹꾹 눌러담아서 내었고,
상에 같이 앉아서는 자꾸 음식 접시를 언니 앞으로 밀면서
이것도 들어보라 저것도 들어보라 하면서 권했다
언니는 첫 만남이라 어려워서 그랬는지 권하는 대로 말없이 꾸역꾸역 먹었다,불쌍해라.
식사가 끝나고 엄마는 과일을 내어 온다면 부엌으로 들어갔다.
오빠가 언니한테 눈짓으로 싸인을 보내니까
언니가 발딱 일어나더니 엄마를 따라서 부엌으로 들어가더니
과일과 접시를 받쳐들고 나와서 깎아내기 시작했다.
아마 오빠가 미리 언니를 단단히 교육시킨 모양이었다.
같이 식사하면서 분위기도 한껏 누그러지고,
또 아버지가 농담으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셔서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고 났을 땐,
거의 “화기애애” 하는 정도였다.
과일까지 다 먹고 상을 치우기 시작하자,언니가 말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음식이 정말 맛있어요.설거지는 제가 할께요,어머닌 쉬세요” 했다.
엄마는 살짝 흐뭇한 눈치였다. 그러면서 나보고 자꾸 눈치를 줬다.
“엉? 뭐? 엄마 말로 해”
“어이구..어찌 손님을 시키냐..네가 같이 들어가서 좀 돕고,얘기좀 같이 하고 그러지”
“아, 내가 이집 머슴이야? 맨날 나한테 일시켜. 오빠땜에 이렇쟎아,오빠가 가서 도와줘.”
오빠의 대답은 둘이서 미리 짜고 치는 고스톱 같은 이미지를 마구 풍겼다.
“쟤 부엌일도 잘 해요..혼자 서울서 자취하면서 살림도 꽤 잘 해요”
어이구 팔불출 났수..
언니가 혼자서 보란듯이 그 많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오빠는 마루에서 언니의 장점들을 이야기하면서 표몰이를 시작했다.
아버지는 일단 몰표를 밀어주었고,
엄마는 좋은 눈치인데 그동안 반대해왔던 것이 맘에 걸리지
단번에 말을 바꾸지는 못하고 좀 머뭇거리고 있었고,난 첫인상도 좋고,
아무나 시집오면 내가 일에서 해방이 되니까 그저 좋았다.
한참 후에 언니가 부엌에서 나왔다.
”어..수고했어” 오빠가 한마디 했다.
언니가 다소곳이 오빠 옆에 앉자,
엄마도 무릎걸음으로 언니에게 다가가서 등을 쓰다듬으면서
“아휴~ 머리카락이 삼단같구나, 그래,자주 놀러 오너라” 했다.
언니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녜,녜” 하면서 얌전하기만 했다.
조금 후에 오빠는 언니를 데려다 주고 온다고 같이 나서고,
나머지 식구들은 아까와는 다르게 왁자지껄하게
“여보 쟤 어떻수?” “엄마,저 언니 일 잘하겠는걸?” 난리가 났었다.
“어디 설거지는 깔끔하게 했나 점수좀 매겨보자..” 하면서 엄마가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어마마 이게 모야….어마 어마 이 일을 어째!”
아버지와 나는 부엌으로 서둘러 들어갔다.
개수대위에 젖은 접시들이며 수저들이 차곡차곡 쌓여서 물기를 말리고 있었고,
내 눈에 별다른 건 뜨이지 않았다.
“설거지 잘 해놨구만..엄마,마른행주로 훔치는거 싫어하쟎아..잘 했네 뭐”
‘아니, 솥단지 말야,솥단지”
아니 이럴수가..그 얌전하게 보이던 언니가 헐크였단 말인가?
압력솥이 절단이 나 있었다.
우리 아버진 아무 음식이나 가리지 않고 다 잘 드시는데 단지 밥만은 좀 까다로우시다.
약간 진 잡곡밥을 좋아하시고,물기만 많은 진밥이 아닌
쌀이 뼈까지 푹 물러야지 좋아하신다.
엄마는 하얀 쌀밥이 고슬고슬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밥을 좋아하시는 관계로
엄마는 좀 비싸지만 독일제 압력솥을 장만하시고
쌀을 앉힐 때 맨 밑에는 콩이나 미리 삶은 보리쌀을 깔고 위에는 하얀 쌀만 깔고 밥을 지으신다.
밥이 다 되면 아버지 밥 그릇에 맨 위의 밥을 한 숟갈 정도만 담고
그 후에 나머지 식구들 밥을 차례로 담는다.
한숟갈 미리 떠 넣은 제일 윗 부분의 밥은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에 대한 엄마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이다.
그리고 잡곡이 섞인 진 밥은 엄마의 사랑이고,
진밥을 약간 바닥에 남겨 일부러 누룽지를 만든 후에
숭늉을 끓여내는 것은 엄마의 사랑이다.
우리 집에서의 압력솥의 가치는 대단했는데,
그 xx압력솥을 처음 본 새언니가 글쎄 솥뚜껑 안의 고무패킹을 잡아 떼어서
그 홈 안까지 깨끗하게 닦은건 물론이고 고무패킹도 싹 닦아서 그릇들 위에 올려 놓았다.
잘 보이려고 너무 애를 쓰다보니 멀쩡한 압력솥을 홀랑 잡아 먹은 것이다.
“아이고,걔가 우리 아들이 정말 좋은 모양이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와서 고무 패킹을 다 잡아 뜯어 놨을꼬…아이구,기특하다”
솥단지를 사단을 냈는데 엄마랑 아버지는 대견하다고 하셨다.
“엄마,나도 솥단지 작살 내면 나 이쁘다고 할거양?” 아양을 떨어 보았다.
“모르고 그런거랑 알면서 일부러 그러는거랑 같니?”
언니를 바래다 주고 돌아온 오빠한테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그래..보니까 얘가 참 얌전하구나. 자주 델고 오너라”
오빠가 너무너무 흐뭇해했다.
그 며칠 뒤 주말에 오빠가 새언니를 다시 델고 왔다.
근데 이번에 언니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 긴 생머리가 싹뚝 잘라져서 짧은 단발머리였다.
“아이고,너 머리를 왜 잘랐니…이쁘던데…” 엄마가 인사도 접고 말씀하셨다.
“어머니께서 머리가 삼단같구나 하셨을 때,긴머리를 안좋아하시는 것 같길래…”
그러니까 새언니는 엄마가 한 말 한마디 때문에 지레 겁먹고 머리를 싹뚝 자른 것이었다.
“아이구 세상에…미안해라..난 긴머리가 예뻐서 그런건데…
어쨌든 너 우리 며느리 해도 되겠다”
엄마는 어른들 말에 고분고분한 언니가 너무 예뻤나 보다.
“그리고 너 우리집 솥단지 사단냈으니까 시집올 때 새로 솥단지 하나 해오렴”
언니는 창피하고 죄송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서 가을에 둘은 웨딩마치를 울렸다.
언니가 우리집으로 이사해 들어오고 우리식구가 되고 난 후에,
”나 오늘 머리 카트 할건데.. 새애기는 머리 어디서 자르니?” 엄마가 물었다.
“저..어머니..저 그� 동네 미장원에서 머리 자르고 아직 한번도 안 잘랐어요.” 했다.
아니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우리가 의아해 하자 언니가 대답했다.
“제가 머리가 잘 안 자라서 몇 달을 길러도 1 센치 자랄까 말까예요”
“그럼 너 그때 머린 대체 얼마나 기른 머리니?”
“음..”언니가 잠깐 생각하더니 “한 8년쯤 길렀던거 같아요”
히익….8년 기른 머리를 우리 부모님께 잘 보이려구 싹뚝 잘랐단 말이야?
“아이구 이런 미련한 것…아이고 미안하다..” 엄마는 어쩔 줄을 모르셨다
.
이건 하나의 예고 언니는 정말 착하다.
오밤중에도 오빠가 “회승아~” 부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오빠서재로 달려간다.
“언니가 오빠 종이야? 좀 화도 내고 그래!”
아무리 내 오빠라지만 가끔씩 오빠 하는 걸 보면 내가 화가 나고,
만약 내 남편이 나한테 그러면 종아리의 털을 하나씩 뽑는 고문을 할 테다.
언니도 얌전하고 오빠도 양반 같은 성격이라
마루에서 텔레비전이라도 같이 보고 있자면,너무 웃긴다
“회승아,너 화났냐?” “아니…”
조금 후에 다시 “회승아 너 화났지?” “아니”
조금 후에 또 묻는다 “회승아 너 삐졌냐? 왜 말 안해?” “안 삐졌어”
그러다가 결국 둘이 싸운다…참 이상한 커플이다.
보다 못한 내가 하루는 언니한테 물었다.
“언니,우리오빠 어디가 좋아서 결혼했어?”
언니는 오빠를 생각하는 것 만으로도 좋은지 씩 웃는다.
“아가씨 글쎄…우리 연애할 때
오빠가 하루는 양파깡이랑 새우깡이랑 과자봉지들을 잔뜩 사가지고
내 자취방에 놀러왔거덩. 둘이 앉아서 비데오로 영화를 보면서 과자를 먹는데,
어쩌면 연애한다는 사람이 나는 한번도 안 쳐다보고
텔레비전만 보면서 손은 자동적으로 과자봉지로 가서 한웅큼씩 과자를 집어먹는거야.
내가 계속 보고 있자니까,손을 넣어서 과자봉지 안에서 더듬더듬 찾는데
과자 부스러기만 있었나봐.
갑자기 과자봉지를 들더니 입에다 들이대고 마시듯이 쭉 들이키면서 부스러기를 다 먹는거야…
너무 귀엽지 않아? 호호호호”
“……………….”
“아가씨 안 웃겨?”
“안 웃겨!”
참말이지 콩꺼풀이 씌어도 단단히 씌었나보다.
그게 귀엽다니 오빠가 코라도 후비는걸 봤으면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았다.
오빠랑 새언니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걸 원했기 때문에 따로 살림을 나지 않고 같이 살았다.
결혼 후에 언니는 명품점 일을 그만두고 엄마 밑에서 살림을 배우고,
알콩달콩 깨소금을 볶다가 아기를 가졌다.
언니가 입덧을 시작했는데,우리 부모님은 첫 손주 보신다고 어찌나 좋아하시는지
예쁜 것만 보고,예쁜 것만 먹고,무리 하지말고…
신신당부를 하시면서 혹시라도 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노심초사 하셨다.
언니에게 최고급 음식만 먹이고 싶어하시는 부모님과는 달리
언니는 “에휴~ 나 고등학교� 학교 앞 분식점에서 팔던 쫄면 먹고싶당..”
언니 지방에서 고등학교 다녔던 걸로 아는데?
엄마는 분식점 메뉴는 잘 모르셨기 때문에 내가 설명을 해줘야했다.
“쟁반국수 같은건데,면발이 냉면같이 쫄깃쫄깃해서 쫄면이야.냉면보다는 훨씬 면이 굵고..”
슈퍼마켓에서 깨끗하게 진공포장 되어있는 쫄면을 사와서 내가 설명하는대로 양념을 하셨다.
“엄마,이렇게 하면 그 맛이 안나지…
약간 구질구질하고 그래야 제맛이 나는건데..
“아니 그래도,애기 가진 애를 어떻게 구질구질하게 해주니?
얘,아가 이거 한번 먹어보거라.”
언니는 몇번 젓가락질을 하다간 더 이상 못먹고 고만 상을 물렸다.
“죄송해요 어머니,어젯 밤부터 쫄면이 그렇게 먹고싶더니만
막상 먹으려니 속에서 안받아요.너무 별나게 굴어서 죄송해요.”
“아이구 별나긴…내 친구네도 며느리를 봤는데,
그 며느리는 얼마나 별난지 입덧을 하면서
제철 과일이 아닌것만 찾는건 물론이고 한여름에 홍시가 먹고 싶더라고 하더래나?
그런데 그것도 홍시를 다 먹고싶은게 아니라
씨를 싸고 있는 주머니만 먹고 싶다고 하더란다 얘”
“어머머머 세상에나…어머님 친구분이 고생하셨겠네요…
그런데 홍시 씨 주머니는 어떤 맛이길래 먹고싶다고 그랬을까요?”
“언니 쫌~
언니가 홍시 씨먹고 싶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면 나 확 가출할거야!”
“그래도 임산부가 먹고싶은거 다 먹고 태교를 잘해야 아기가 짝짝이 눈이 안되지.”
애기 가졌다고 너무 잘해주는거 아닌가? 별난 시부모에 별난 며느리다.
입덧이 지나고 집에 무료하게 있으려니까 언니도 무척 심심했나보다.
하루는 언니가 “어머니..저 화장이랑 미용기술 좀 배울까봐요” 운을 떼었다.
“화장? 미용? 에구 얘, 관둬라..그거 파마약 만지고 하면 얼마나 나쁜데..고만둬라”
“애기 낳고나면 저도 다시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명품점이 보수는 좋아도
하루종일 서있으면 힘들거든요..
래서 화장이랑 미용 꼭 배워보고 싶었는데..그럼 나중에 제가 가게를 내도 되구요…”
언니가 뭔가 배워보고 싶기도 했겠지만 사실은 콧바람도 좀 쐬고 싶었을거다.
처음엔 아기 가져서 어딜 자꾸 다니냐고 반대 하시던 엄마가
산모가 임신기간 동안 손을 많이 움직이면 태아의 뇌 활동에 좋은 영향을 준다는
기사를 읽으시고는 생각을 바꾸셨다.
“그래 얘,배워봐라.하지만 파마약은 안된다..
그거 화학 약품이고 태아에게 나쁘니까,정 하고싶으면 지금은 커트 하는것만 배우고
파마는 나중에 해라”
그 날로 언니는 당장 달려나가서 미용학원에 등록을 하고
메이크업 과목도 수강을 시작했다.
첫날 학원을 다녀와서는 재미있다고 법석이었다,
그리고 미용가위며 메이크업 도구들을 사느라고 많이 걸어다녔는지
초저녁부터 쓰러져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둘째날 얼굴이 좀 부석부석해서 나가더니만 울상으로 들어왔다
“어머니,오늘 커트 기본 배웠는데요,가위를 이렇게 들구요
(새끼 손가락에 걸고 자르는 시범을 보여주면서)
이런 자세로 자르는거래요.그리구요…
숙제로 식빵봉지로 가득 크리넥스 잘라오래요….1Cm 간격으로요…..두 봉지나요…”
애기 가졌다고 집에서 편하게 있다가 이틀 연달아 나가더니
피곤이 겹쳤는지 언니는 죽을 상이었다.
“얘,걱정 마…좀 들어가서 쉬어라”
언니를 억지로 등 떠밀어서 방으로 밀어넣고는 엄마는 이방 저방으로 다니면서
클리넥스 통을 들고 마루로 나오셨다.
“야,너 여기 좀 앉아봐”
나를 붙들어 앉히는데 엄마 손엔 반짇고리에서 꺼낸 커다란 재봉가위가 들려있었다.
“잘라!”
“뭘?”
“클리넥스 잘라. 내일까지 느이 새언니 두봉지 만들어 가야 한대쟎아”
“아니 그게 언니숙제지 우리 숙제야? 그리고 미용가위로 잘라야지 재봉가위로 잘르면 어떻게 해?”
“넌 미용가위로 자르고,난 재봉가위로 자르면 되지,둘이 하면 빠르쟎아.”
이거 해 본 사람만이 안다.
크리넥스가 얼마나 입자가 곱고 하늘하늘한지 잘라서 봉지에 담으면 착 까부라져서
죽어라고 잘라봐도 별로 진전이 없다.
엄마는 처음에는 언니가 가르쳐준 자세로 몇장 자르는가 싶더니만
“아휴,선생님이 보고 있는것도 아니고 뭐 어떠냐…”
하더니 공작시간에 종이 오리듯이 마구 자르기 시작했다.
난 재봉가위를 들고 시작했는데,
재봉가위가 워낙 커서 새끼손가락을 걸고 자르는건 애초에 시도해 보지도 않았다.
언니는 쓰러져서 자고 엄마와 나는 그날 밤 안으로
식빵 봉지 두개를 가득 채워야 한다는 사명아래 미친듯이 가위질을 했다.
저녁때 아버지가 한의원을 닫고 올라오셨는데,
우리 모녀가 앉아서 크리넥스 자르는걸 보시더니 버럭 역정부터 내셨다.
“아니 대체 뭣들 하는 짓이야?
왜 멀쩡한 휴지는 잘라내고 있는거야?” 쩌렁쩌렁 목소리가 울렸다.
언니가 푸석한 얼굴로 뛰어나와서 “아버님 사실은요,여차저차해서요 이러쿵 저러쿵 했거든요….
흑흑흑” 언니가 살짝 울었다.
아버지는 앞뒤 없이 먼저 우리에게 화를 낸게 미안하셨는지 상황 수습에 나섰는데,
"내 잠깐 내려갔다 오마” 하시더니 다시 내려가셨다.
잠시 후에 한의원에서 작두를 들고 올라 오셨다.
“아니 녹용 자르는 작두는 뭐하게요?” 엄마가 물었다.
“아,글쎄.. 나하는 것만 두고 보라고..이게 얼마나 쉬운지…”
아버지가 자리를 잡고 앉으시더니 크리넥스를 한 30장쯤 빼서 차곡차곡 추리시더니만
작두에 넣고는 쓱쓱 작두질을 하셨다.
“우와와와~~~”
평생을 녹용하고 인삼 자른 아버지 솜씨였다.
그 정확한 간격하며 리드미컬한 작두질 소리란 정말 예술이었다.
“아버지,
“예끼..아버지는 쉬지않고 작두질을 하시고
우린 옆에 앉아서 30장씩 크리넥스를 뽑아서 가지런히 해두었다가
아버지의 작두질이 끝난다 싶으면 척 들이밀었다..
아버지가 몇번 작두질을 하고나니까 벌써 식빵 봉지 가득히 크리넥스로 가득했다.
멋진 밤이었다.
그렇게 날은 가고 어느덧 나는 방학이 끝나고 이태리로 돌아가야 했다.
언니도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고,
가위질도 정석대로 새끼 손가락을 걸고 능숙하게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내게 화장품 샘플들도 잔뜩 싸주면서 몇가지 기본 색조배합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언니는 특별히 메이크업에 상당한 재능을 보였는데,
알음알음으로 소문이 나서 가끔씩 집으로 엄마 친구분들이 딸들을 데리고 와서
졸업사진용 화장을 해달라고 하기도 하고,세 집 건너 쌀집아줌마는 딸이 선보러 가는데
예쁘게 꾸며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했다.
배불뚝이 언니가 그렇게 벌은 용돈을 내게 쥐어주면서
“아가씨,쓰던 샘플 화장품 줘서 미안해.이태리 가서 좋은거 새걸로 사서 써.” 했다.
우리 언니 정말 착하다.
내가 이태리로 돌아오고 나서 다음해 준원이가 태어나고,
언닌 그때까지 파마약을 못 만지게 하는 엄마 때문에 커트만 잘하는 미용사가 되었다.
이런 말 하면 한국 미용사 협회에서 뭐라고 할지 몰라도,
새언니는 집에서 아버지부터 엄마,오빠 머리는 물론이고 동네 아줌마들 머리도
커트는 기가 막히게 해내었다.야매로 말이다.
내가 준원이와 처음 대면할 때 쯤엔 언니도 다시 미용학원에 등록을 해놓고
그렇게 바라던 파마를 배우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이제 우리 새언니에 대한 소개를 접고,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발단은 내가 준원이 머리카락이 노랗다고 말한데서 부터였다.
“무슨 애가 머리카락이 이렇게 노랗냐..히마리도 하나도 없는게..
대머리는 2대에 걸쳐 난다던데,얘 우리 아버지처럼 되는거 아냐?”
“넌 어쩜 어린애를 두고 방정맞은 말만 골라서 하니,누가 시누이 아니랄까봐..”
엄마가 말로는 그래도 잠깐 양팔을 가슴앞에서 엊갈려 껴안고는
손가락을 피아노 치듯이 팔을 두드렸다.
우리 엄마니까 척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만했다.
만화에서 주인공이 골똘히 생각할 때 뽀글뽀글 말풍선이 머리 위에 나타나는 것처럼
난 엄마의 대사까지 다 읽을 수 있었다.
‘준원이 머리를 밀어줄까? 새아기한테 그러자고 하면 시어미짓 한다고 그러겠지?
흠..그래도 우리 손주가 할아버지를 닮아서 머리가 벗겨진다면 –
잠깐 준원이 얼굴에 아버지 헤어스타일을 합성해 보는 듯- 으이구,그런꼴은 못보지….’
고개를 좌우로 진저리 치듯 흔드셨다.
“헤헤헤 엄마,애기 머리 밀어줄랴구 그러지?”
“엉? 아니 뭐.. 아이구 내 새끼도 아닌데 그러자고 하면 에미가 뭐라구 안할래나 모르겠다”
“내가 얘기할께,애기 인물나게 해주겠다는데 왜?
그런 시누이 짓은 내 전문이니까 내게 맡겨두라구.”
준원이는 우리의 대화내용은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보행기에 앉아서
이것저것 다른 멜로디가 나오는 버튼을 누르면서 정신을 팔고 있었다.
“어이 이쁜놈~ 오늘 저녁이면 넌 속세를 떠나는게야.. 머리깎고 산으로…
"아얏”
엄마가 어깨를 한 찰 때렸다.
애기 머리 밀어주는게 무슨 대통령 선거같았다.
저녁때 식구들이 다 모이자 엄마가 먼저 운을 떼셨다.
"준원이가 머리가 너무 노랗다구 자꾸 고모가 놀리네..
하기사 우리 애들하고 비교해봐도 좀 머리숱이 너무 없기도하고..
우리애들은 낳아놓으니까 머리카락이 새까맣고
얼마나 길던지 어깨까지 치렁치렁했는데 말이지..”
아니 우리가 무슨 타쟌의 후예라고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펄럭거렸다는 거야.
더군다나 또 고모가 그랬다고 나를 꼭 집어서 얘기를 꺼냈으니
이젠 내가 십자가를 져야 할 판이었다.
“맞아 언니,쟤 머리 너무 노랗지 않아? 머리숱이 저렇게 없으면 말이지..”
언니와 내가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얼굴을 돌려서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언니도 자연히 내 눈길을 따라서 얼굴을 돌리다가 “푸훗” 웃었다.
“내가 뭐 아아때(애기때) 부터 머리숱이 없었는동 아나?
다 늬들 뒷바라지 하느라 애쓰다가 그랬지” 아버지가 한말씀 하셨다.
“아버지,대머리는 2대에 걸쳐서 난다구 그러던데요?
할아버지는 생전에 흰머리 한올 없이 머리숱이 소나무 숲같이 빡빡했었쟎아요.
그런데 아버지가 머리숱이 없는건 역시 유전자가 문제인거예요”
오빠도 “하긴 나도 머리숱이 많지만 2대에 걸쳐 대머리가 생긴다는 말을 듣고 좀 걱정했었는데..”
모두들 대충 머리를 밀자는 쪽으로 가는 분위기였는데 언니만 맘을 못 정하고 있었다.
“새아가,아 배코 쳐주라” 아버지가 한말씀 하셨다.
난 언니 머리위에서 말풍선을 보았다.
머리숱이 없으니까 밀어주는것도 좋을거야..
근데 우리애기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으면 너무 우스워 보일텐데..’
오빠랑 언니랑 방으로 들어가서 조금 상의를 하는 눈치더니
언니가 전기이발기을 가지고 나왔다.
미용사라서 언니는 온갖 이미용기구를 가지고 있었다.
준원이 머리카락이 배냇머리인데다 숱도 적으니 가위보다는 면도하는 것 처럼 밀어주려고
이발기를 쓰려는 모양이었다.
애기한테 보자기를 씌어놓으니 준원이는 마냥 신나했다.
“어이 준원이~ 수퍼맨 같은걸~”
보행기에 앉은 상태로 위로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언니,쟤가 너무 흥분하는거 아냐? 저러다가 귀자르겠다”
결국은 만만한게 고모라서 언니가 머리를 면도하는 동안
내가 준원이 앞에서 정신을 빼놓기로 하고는
정열을 바쳐서 준원이의 기쁨조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언니가 이발기계를 작동 시키니까
“윙~~” 하는 모터소리에 나보다 기계에 더 관심을 보이는거였다.
언니가 기계를 머리에 가깝에 가져가자 준원이는 소리 나는 쪽을 보려고
고개를 뒤로 젖혀서 이쪽 저쪽으로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캥캥캥 하면서 울음직전의 준원이의 단독특허음향을 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빼액~ 하고 울기 시작했다.
“아가 아무래도 안되겠다,내가 준원이를 안을께”
엄마가 준원이에게 둘러준 보자기를 풀러내고 준원이를 앞쪽으로 안더니만
“묶어라!” 하셨다.
나만 신이 났다.
“예이~~~” 포졸 흉내를 내면서 엄마와 준원이를 한데 뭉쳐서 보자기로 둘러 쌌다.
준원이가 옴짝달싹을 못하게 포박을 해놓고는 면도를 시작했다.
“위잉~~” 하는 기계소리와 함께 언니가 홀짝홀짝 울었다.
“아 왜 울어 언니,얘가 머리 깎는다고 도 닦으러 가는것도 아니고
모양 내주겠다고 깎는건데..아 나 참”
“그래도 아가씨, 준원이가 불쌍해”
나 원 참 불쌍할 것도 많다.
보기엔 머리숱이 없는 것 같았는데
막상 바닥에 떨어진 배냇머리카락을 보니 꽤 양이 되었다.
“머리숱이 꽤 되네..괜히 밀어주자 그랬나?” 나의 한마디에 언니가 막 째려 보았다.
버둥거리는 준원이를 엄마가 꼭 끌어안고
오빠가 준원이 머리를 꼭 붙잡고 언니는 재빠르게
기계를 놀려서 윗부분은 끝냈는데,목덜미 쪽으로 아직 노랑머리가 많이 있었다.
어른 같으면 “고개를 숙이세요~” 하면서 목덜미쪽을 깍으련만
안그래도 버둥거리는 아기한테 부탁은 도저히 무리고
깎고 싶어하는 어른들이 알아서 깎아야만 했다.
“엄마 준원이 안은 채로 좀 일어나 봐봐” 엄마가 끄응 하면서 일어났다.
“이젠 준원이를 어깨쪽으로 좀 높이 안아 들어봐봐”
준원이 빡빡이 머리가 엄마 어깨께로 올라왔다.
그 다음에 내가 엄마 등 뒤로 돌아가서 방바다에 앉았다.
내가 주저앉은 자세로 준원이 이름을 부르면서 깍까꿍을 시작했다.
준원이가 엄마 어깨 위로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는 나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악을 쓰면서 울더니만 이젠 속눈썹에 눈물방울을 매달고는 헤헤 웃었다.
어라..갑자기 준원이가 너무 불쌍했다.
눈물을 매달고는 헤헤 웃는 모습이,
지금 자신이 우리에게 배신당하고 머리가 빡빡 밀린다는 것도 모른채
순순한 웃음을 짓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 같았다.
“언니..언니 말대로 진짜 준원이 불쌍하다”
내가 조금 분위기가 바뀐걸 알아챘는지 준원이가 또 아랫입술을 삐죽거리기 시작하더니만
캥캥거리기 시작했다.
“너 절루 가있어” 오빠가 날 밀어내고는 오빠가 내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서
준원이에게 다시 깍꿍을 시작하고 겨우 준원이의 머리밀어주는 일을 다 끝낼수 있었다.
우리 서씨들의 공통점인 살짝 옆짱구 인게 머리통이 이뻤다.
내가 준원이 머리통을 쓰다듬으면서 “오빠, 얘 프리링 닮지 않았어?”
“엉? 프링? 그게 뭐야?” 엄마가 물었다.
“어 프리링이라고 드래곤 볼에 나오는 귀여운 아기중이야”
“드래곤 뭐? 그건 또 뭐야?”
“그게 뭐긴 뭐야. 만화책이지 헤헤헤
우리 젊은사람들은 다 그런거 봐야지 밖에서 사회생활 할 때 대화에서 안 밀린다구.”
언니도 준원이 머리를 빡빡 밀어놓고는
“미안해 아가야.” 하면서 좀 울더니만,자꾸보니까 언니도 이제 눈에 익는지 더 이상 울지 않고,
이젠 귀엽다고 까지 했다.
우리 준원이는 머리가 노래도 이쁘고
머리를 빡빡으로 밀어도 이쁘고,
안 이쁜 구석이 없다.
그날 저녁에 내가 준원이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프리리리링” 하면서 얼굴을 흔들면,준원이는 좋아라 했다.
아이구 빡빡이 우리 준원이..머리를 밀어놓고 나서 매일 들여다봐도
머리카락이 빨리 자라지 않아서 우리 어른들이 가슴을 졸였다.
머리가 잘 안 자란다는 언니의 유전자 때문에 빡빡 밀었는데,
머리 나기까지 10년쯤 걸릴까봐 말이다.
요즘의 준원이는 아기때 머리를 밀어줘서 인지 머리숱도 많고 새까맣다.
머리카락 유전자는 우리 오빠를 닮았는지 새까맣고 굵은데다가
이마 양옆의 머리가 약간 아쪽으로 쏠려서 자라는 모습까지 오빠를 쏙 빼닮았다.
그렇게 머리숱이 많은데 엄마는 여전히
“대머리는 2대에 걸쳐서 난대더라” 하면서 걱정을 하신다.
“엄마,요즘에 기술이 얼마나 좋아졌는데..
나중에 준원이 대머리 되면 내가 다 심어줄께 걱정말라구요.”
내 입방정 때문에 엄마가 저렇게 노심초사 하시니,
혹시라도 나중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책임져야 할 것 같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엄마한테 안보이게 살짝 나는 말풍선을 이용해서 얘기한다.
‘하하하하 준원이가 대머리? 한번 보고싶은걸?
우헤헤헤 대머리래..대머리…대머리..헤헤헤’
예전에 준원이 머리를 잘라주면서 눈물 짓던 언니는 요즘엔 많이 달라졌다.
“가만히 있지 좀 못해?” 하면서 준원이 등짝을 두들긴다.
“무슨 애가 이렇게 한 시도 가만있지를 못하고..내가 못살아.” 빽 소리 지른다.
그 옛날 다소곳하던 언니도 이제 서씨 집안 사람 다 되었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