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원이 만세
하루 중 어느때고 조카녀석의 네살 때 사진을 대할때마다
용량이 작아서 어제 저녁에 뭘 해먹었는지도 가물가물한 내 머리속에선
끊임없이 조카와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컴퓨터로 치자면 악성 조카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고나 할까,
그리 높지도 않은 IQ 이건만
내 조카에 대한 무궁무진한 추억들은 용케도 숨어있는 자리를 박차고 나와
나를 슬며시 웃음짓게 한다.
아이고,저 웃는 모습 좀 보라지…
핑크색 액자속의 내 조카는 하이칼라로 옆 가리마를 타서 곱게 머리를 넘겨빗고
줄무니 남방셔츠에 넥타이까지 척 맸다
거기다 머리 위에는 중절모자까지 사뿐히 얹어 놓은 것이,
쯧쯧쯧,이만하면 장가 보내도 되겠네…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차림새며 앙증맞게 유아용 장난감까지 들고 서서 살짝 웃는 폼이
우리 엄마의 코디솜씨리라.
꼬마신사 흉내를 낸 차림새와는 달리 노랑 몸통에 분홍색 부리를 한
땡글땡글한 플라스틱 병아리를 두손으로 받쳐들고 있는건,
지 동생 유나의 백일 기념 사진을 찍으러 간 김에 곁다리로 싼값에 한장 찍은 때문인데,
이눔자식이 얼마나 이쁜지 막상 주인공인 유나보다 인물이 더 돋보인다.
보면 볼수록 내 새끼도 아닌데, “뉘집 자식이 저리 잘생겼누” 입속말을 중얼거리는
나는 분명 조카 비이러스에 감염된 중증 환자이다.
난 준원이라면 꿈뻑 죽는다
.나 뿐만 아니라 우리 엄마도 준원이의 빨랑 오라는 전화 한통이면
일껏 곗돈 받으러 간대놓고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온다.
준원이를 아끼는건 이 녀석이 워낙 이쁜 짓만 해서이기도 하지만,
오랜 이태리 유학시절 엄마,나,준원이 이렇게 셋이서 그야말로 4개월을
동거동락하며 많은 추억을 만들었기 때문이고,그보다 훨씬 전에는
내가 질투심 많은 고모였기에 미안함이 많이 남아 있어서이다.
난 우리집에서 막내인데다 외동딸이다.
그야말로 손가락 하나로 위의 오빠 둘을 짐꾼부리듯 하고,
”양념딸”이라고
아버지가 노상 무릎 위에서 키운 덕에 스물이 넘도록 막내 티가 줄줄 흐르고
집안에서의 내 권위는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그런 바위같던 내 위치가 새언니가 아기를 가지면서부터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준원이가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터는 난 궁궐 뒷뜰에서 우물이나 기르는 무수리 신세가 되었다.
우리집의 시계는 준원이를 축으로 돌았고,
식구들의 호칭도 우리아들,우리 며느리,우리딸에서
자연스레 준원에비,준원에미,준원이 고모로 바뀌었다.
준원이와의 첫 대면은 비데오테입으로 시작되었다.
이태리에서 막내딸이 공부하느라 적적하다고
꼬박꼬박 MBC 미니시리즈며 코메디 프로그램을 6시간짜리 비데오 테이프에
꽉꽉 녹화되어서 날아오던 것이 3.1절 아침에 걸려온 짧은
오빠의 전화
“만세,아들이다~” 하는 외침 이후로 뚝 끊겼다.
대신 얼마 후부턴 콧대도 하나도 없고 살만 두리뭉실한 조카를
내리 6시간씩 비데오로 찍어서 보내오기 시작했다.
준원인 애기때 부터 순해서 그저 드러누워서 지 손가락이나 만지작거리고
무료하게 하품이나 해대고 그러는데,옆에 있는 어른들이 더 요란스러웠다.
사실 말이지 멀거니 드러누워있는 애기보단 옆에서
호들갑 떠는 어른들 재롱이 내겐 훨씬 재미있었다.
그렇게 비디오로 준원이 얼굴을 익히고 몇 개월 뒤 여름방학때 한국으로 날아갔다.
그래도 고모라고 짐 챙기면서
3.4개월된 아기들이 가지고 놀 수 있는 딸랑이며 이것저것
경제적이고 오래 쓸수있는 걸로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가지고 갔더니만,
서울 우리집 내방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준원이 기저귀며 애기용품들과 함께,
어린이용 백과사전까지 벌써 들여와서 책꽂이에 가지런했다.
드디어 준원이와의 첫 만남.
초 호화 럭져리 보행기에 앉아서 내쪽으로 떼밀려서 굴러오는데..
이눔자식 낯이 설어서 끙끙거리더니만 굴러오면서 울기부터 하는거였다.
“우에에에엥”
내가 미쳐 손쓰고 어쩌고 할새도 없이
우리엄마가 냉큼 준원이를 들어 올리더니만 얼르기 시작했다.
“아이구 우리 왕자님이 언짢으셔..나쁜고모가 우리 준원일 울렸네 때치때치”
아니,내가 뭘 어쨌다구,난 그냥 어정쩡하니 서 있기만 했구만..
더군다나 코찔찔이 아이한테 경어체를 쓰는 엄마도 좀 못마땅했구..
난 대뜸 기분이 상해서 –
솔직히 조카에 대한 내 유아스러운 질투심 때문이었지만-
발끝으로 보행기를 툭툭차면서 “나도 이런거 사줬었어?
난 할머니 등에 업혀 키웠대며,얘는 왜 이런 요란스러운 보행기 사줘?”
엄마는 오랜만에 보는 딸의 어리광아닌 어리광은 이제 더 이상 용납할수 없다는 식으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꺽꺽 숨넘어가는 소리로
울음 끝을 마무리하는 준원이게만 시선을 두면서
“그땐 보행기같은거 없었었요.그래도
할머니가 업고 저어기 금남시장까지 매일 마실 갔었어요” 또다시 애기 목소리 흉내다.
“엄마 쫌~” 여전히 난 안중에도 없다.
가만히 엄마 등뒤로 돌아가서 준원이와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가,
아직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동자가 내 레이다에 포착되는 순간
난 두 손을 귀옆으로 들어올리고 두 눈을 허옇게 까뒤집으면서
미친듯이 얼굴을 좌우로 흔들어댔다.
“우엥~” 헷헷헷,그럴줄 알았지..
“어마마,얘가 왜이래!!”
우당탕 쿵탕 준원이의 울음과 동시에 엄마의 비명,….
날 공항에서 델다놓고는 새언니와 방에 들어가서 준원이 로보트 조립한다고
꿈쩍도 않던 오빠내외가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왔다.
난 나의 아티스틱한 퍼포먼스에 아직도 약간 도취된 상태였고.
내가 정신을 차렸을땐 준원이의 얼굴은 푸른 보랏빛이고 울음소리도 안내고
입만 딱 벌린채 정지모드고,새언닌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엄마와 오빠는 식은땀을 흘리면 준원이 몸을 주물러대기 시작했는데,그러기를 10분…
나중에 알고보니 고작 1분 정도였댄다
.하지만… 난 정말 조카가 죽은줄 알았다.
“우에에에에에에엥~~” 조카가 안 죽었다.
아까보다 더 큰 소리로 거의 광적인 울음소리가 터져나옴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날 쥐어박았다.
“이노무 지지배야, 애 죽이는 줄 알았쟎아”
“넌 어째 아직도 그러냐..하는짓 하곤..”
“아가씨, 헝헝헝”
아니,왜 또 나만 갖고 뭐라그래
,애 성질하고는..누굴 닮아서 저러냐는 내 일갈에 나들 날 쳐다본다.
나 닮아서 그렇다는 무언의 그 눈빛들.
그날 서울에서의 첫날 저녁,자장면 시켜 먹었다.
내가 방학때 마다 서울에 돌아오는 첫날은 항상 엄마가 공항에 마중나와 있고
집에 도착할때면 상다리가 부러져라 마루에다 큰 상 두개를 맞붙혀 펴놓고는
지짐이다,전골이다,잔칫집 분위기였는데 이제 난 영락없는 향단이 신세였다.
그러고보니 오후에 공항에도 오빠만 마중 나왔었네…갑자기 분했다.
온가족이 빽빽울다 숨넘어가는 조카녀석 땜에 진이 다 빠져서
저녁식사고 뭐고 다 뒷전이고,이젠 드러누워서 씩씩 잘 만 자고있는 조카녀석한테
바싹들 붙어앉아서 근심스런 표정들이다.
“얘 괜챦을까..입술을 움찔거리는게 악몽을 꾸나봐”
새언니가 울먹거리면서 오빠를 쳐다봤다.
“언니 쫌~~”
나 참,애가 울다가 기도 넘어가고 그러는거지 난리법석도 유별나다.
나 어렸을땐 오빠들이 던진 야구공을 강속구로 뒷통수에 얻어맞고도 끄떡 없었다,
하긴 그래서 내가 좀 유별난가…
어쨌든 사내아인 좀 험하게 키워야 한다는게 내 지론이다.
“언니,애는 막 굴려서 키워야 해.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
그렇게 떠받들어 키우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된다구.”
난 시누이니까 좀 시누이짓 해도 괜챦다.
“아가씨,아가씨가 애기 낳아봐.
아마 나보다 더 할걸.아휴~벌써부터 눈에 훤하네 뭘”
“언니가 날 한참 잘못봤네,
"난 말이지 나중에 애기 낳아서 절벽 아래로 굴려서 기어 올라오는 강인한 놈들만 키울거라구……
.아얏”
엄마의 재빠른 손놀림은 경이로왔다
벌써 내 어깨를 두어번 쥐어박고는 어느 틈에 자고있는
준원에 가슴께로 사뿐히 올라가 있었다.
서울 도착한 첫날부터 난 이리저리 채이고,
다음 비행기로 도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까지 심각하게 했었다.
아래층에서 셔터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아버지 오늘 나 왔다고 한의원 일찍 닫으시나보네”
좀 있으려니 층계참에서 아버지 발자국 소리가 들리길래
난 발딱 일어나 인터폰에 연결된 버튼을 눌렀다.
“찌이잉~ 철컥”
현관쪽으로 얼굴을 내밀고
“아버지,이제
준원이가 마치 날으려고 도약하는 새처럼 양팔을 버둥버둥거리면서
허우적 거린다 싶더니만 빼액 우는것과 동시에 ....
엄마,오빠,새언니의 분노에 찬 눈초리로 날 노려보았다.
아버지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시면 “나 열쇠 있는데..” 하셨다.
알고보니 준원이가 태어나고는 모든 상황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좀 더 일찍 한의원 문을 닫고 올라오시게 되었고,
식구들이 모두 열쇠를 나눠갖고 혹시라도 아기가 잠들었을 때를 대비해서
인터폰은 그저 장식용이고 각자 열쇠를 사용한다는 점이었다.
조카와의 내 첫 만남은 출발이 썩 좋지 않았다.
난 내 확고한 집안에서의 위치가 마구 흔들린다는 것을 피부로 느꼈고,
더군다나 그게 다 조막만한 저 아기때문이라고 생각하니
어이없음,충격,배신감,슬픔이 뒤섞여서 우울했다.
더군다나 생색 내겠다고 사온 장난감들도 서울의 식구들이
미리 사다놓은 것들에 비교해 봤을 때,안 내어 보이는게 더 좋을 듯 싶었다.
말이 Made in Italy 지 알록달록 유치한 색깔하며
조잡한 형태가 아가방인지 아기방인지의 우아한 파스텔톤에
KAIST 의 과학자들이 만들었는지 그 정교함에 밀려 더욱 유치찬란해 보여서
가방에서 꺼내지도 못하고 옥상으로 통하는 층계참에 가방채로 던져놓았다.
내 방은 피아노만 그대로 있다 뿐이지,이젠 내 방 같지도 않았다.
어렸을적 보물을 담아두었던 아버지의 감사패 함도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옷장이 있던 자리에는 아기용 수납장을 붙박이장으로 해서 달아두었다.
말이 아기방 이지만 아직 혼자서 방을 사용할 나이가 아니라서 휑하니,
아기방 이라기 보단작은 아기용품점이라고 해야할지,
아기용품 창고라고 해야할지,그 중간쯤 되는 분위기였다.
다시 마루로 나와서 “내 물건들 어딨어?”
이건 누구에게가 아니고 그냥 모두에게 해당된 질문이었다.
“ 어라,아무도 들은척도 않았다.
저녁땐 시간도 없고,정신도 없다면서 자장면을 시켜주더니
이젠 온갖 과일을 갈아서 요구르트에 섞어서 준원이한테 떠먹이고 있었다
.나머지 식구들은 쳐다보고 있었구.
“어디있어,그 갈색 감사패 함말야, 내가 내 봉숭아 손톱이랑 담아둔거..”
“…………..”
“나 어디서 자” “…………….”
“나 오늘 어디서 자냐구?”
소리를 빽 질러주니까 그제서야 엄마가 대답했다.
아마 내가 한 옥타브 올려서 더 크게 소리지르면 준원이가 또 울까봐,그제 걱정이셨겠지만.
“아무데서나 자,안방에서 자던지….아이구 처녀애 목청이라고는…”
안방 침대 발치께에 내 자릴 봐놓고는 다시 마루로 나가서 식구들과 합류했다.
준원이는 어린 것이 꾀가 말짱해서
내가 저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 이란걸 알았나보다.
다른 식구들과는 눈맞춤도 하고 헤헤 웃다가도 나랑 눈이 마주치면 피하거나,
곧 울것처럼 아랫입술을 움찔거리며 마치 울려는 것처럼 슬픈 표정을 했다.
“야,너 쇼하는거 다 안다…고모 마마시다,나한테 잘보이라구..”
한마디 해주고는 마루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채로 한쪽 다리를 세운 무릎위에 얹고는
건들건들..집은역시 언제나 편했다.
엉,근데 이게 무슨 냄새지???
킁킁거리며 카펫에다 코를 박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좀 콤콤한 냄새 날거다..준원이 우유쏟고 그래서 그래”
“에이 참,지저분하게..나중에 식탁메너 알만하다”
내가 뭐라고 더 해봤자 아무도 내편 안들어 줄거니까
나도 그때쯤엔 내 위치를 대강 파악하고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누운 상태로 “오빠 나 리모콘” 하니까 예전엔 내 손에 싹 쥐어지던 리모콘이
이젠 내 배 위로 털퍼덕 떨어졌다.
“엉? 모야..텔레비전이 저리로 올라갔어? 목 부러지겠네”
우리 아버진 서양식 소파보단 바닥에서 좌식생활이 더 몸에 익숙하신 분이라,
우리 식구는 식사 할때만 식탁에 앉고 마루에서나 방에서는 바닥에 앉는다.
당연히 모든 가구들은 낮고,텔레비전도 앉아서 볼 수 있는 높이로
낮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제서야 알았지만
내방의 준원이 붙박이 장과 같은 색깔로 수납장이 짜여서 새로 놓여있고
텔레비전은 그 위에 올라가 있었다.
식구들도 좀 뻣뻣한 자세로 목을 들고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엉,이제 준원이가 보행기 타니까 ....
여기저기 쏜살같이 다니면서 얼마나 저지레를 하는지,비데오도 잡아먹었다..
글쎄 젓가락을 넣고 막 후비고 있쟎겠니..그래서 텔레비전이랑 ..
아이 손에 닿을 만한 것들은 다 높은 곳에 올려놨다”
“에이, 쟤땜에 다들 디스크 걸리겠다”
“안그래도 소파 살려고 그래…근데 잘 때 좀 불편 할텐데…”
그게 뭔소리인가 했는데 오래지않아 내 의문은 풀렸다.
졸다깨다 하다가,”다들 안자? 난 좀 피곤한데..”
둘러보니 모두들 아직 마루에 있었다.
“그래,나도 좀 피곤하다…얘,잘 준비해라”
엄마가 아이구구구 하면서 무릎을 한번 짚고 일어나서는 안방으로 가시더니
이불이랑 베게를 들고 나오셨다.
“어디서 잘려구?” 난 의아했다.
엄마는 피곤할 테니 얼른 들어가 자라고 하시더니 마루에 이불을 깔고 자리를 보셨다.
알고보니 준원이가 밤에도 깨서 울고,
기저귀도 갈아줘야 하고,
뉴스에서 보니 자다가 숨막혀서 갓난아기기 죽었다는 사고소식도 있었고..
여러가지 상황으로 우리 엄마 아버지가 준원이와 함꼐 마루에서 주무시고,
오빠랑 새언니는 방에서 자는 대신,
방문을 열어놓고,언제라도 달려나올 전투자세로 잔다는 것이었다.
아항,그래서 소파를 들여놓으면 자리를 차지하니까,
잘 때 불편할거라고 이적까지 안사고 있었던것이다.
“다들 너무 하는거 아냐 이거? 외국에서는 애들 갓난아기때부터 따로 재우고 그러는데..”
역시 들은 척 만척하면 엄마와 새언니는 잠자리 준비에 바빴다.
새로 소독한 우유병에 가루분유를 적당량 넣어서 머리맡에 서너개 두고,
끓인 보리차도 보온병에 담아서 우유병 옆에 나란히 배치하고,
새 기저귀도 차곡차곡 쌓아서 대나무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고도 뭐가 빠졌는지 계속 분주하길래 난 방으로 들어와서 벌렁 누었다.
좀 있으려니 “잘자라” “안녕히 주무세요” …그러더니 조용해졌다.
마루에서 아버지와 엄마가 나지막하게 이야기하시는걸 들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었다.캄캄하네…
시계를 찾아서 보니 겨우 두시간도 채 못잤는데 정신이 말똥말똥해졌다.
시차 때문이야…기내에서 악착같이 안자고 버티는건데…후회막급이었다.
첫날 이렇게 시차적응에 실패하면 앞으로 이삼일은 더 계속 이렇게 밤낮이 바뀔텐데..
냉장고에서 뭐라도 꺼내 먹으려고 마루로 나섰다.
아주 깜깜한건 아니고 낮은 조명등이 켜져 있었다,
아마 아기 때문에 그런 모양이었다.
엄마와 아버지는 잠드셨는지 고른 숨소리가 들렸고,
난 살금살금 냉장고로 가서는 빼꼼 문을 열었다.
반찬들이며 양념들이 투명 타파통에 들어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다.
“이 씨..반찬 많에..아까 그냥 밥만 해서 이거랑 먹으면 되었는데,왠 자장면?”
냉장고 문을 연채로 엉거주춤 서서
무말랭이 통에서 무말랭이랑 씀바귀 잎을 몇 개 꺼내먹었다.
엄마 음식솜씨는 하여간..입에 짝짝 붙는 맛이란..
찬물 한컵 마시고는 냉장고 문을 닫았다..다시 어두움.
마루 쪽으로 나오니까 불빛 때문에 어두운 중에도 사물 분간이 훨씬 쉬웠다.
방쪽으로 살금살금 가는데,무언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들은듯도 하다.
돌아보니 준원이 두손이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아니,성질나쁜 애기가 밤에 잠도 안자다니,완전 엎친데 덮친 격이군”
하면서 몸을 숙이고 들여다 보았다. “모야,지금 날보고 웃는거�!”
준원이가 헤헤 웃었다.날 보고 웃었다.
이빨도 하나도 없는게 날 보고 입을 양옆으로 길게 벌리고는 웃었다.
“오호 나랑 놀자구? 짜식,니가 나의 스마트한 면을 알아보았구나.”
준원이 옆에 앉아서 눈을 맞추고 살짝 웃어주었더니,이 녀석도 같이 웃었다.
이번엔 손가락을 보여 줬더니,두 손을 뻗어서 내 손가락을 꽉 쥐었다.
뭐랄까,따뜻하면서도 말랑말랑하고,약간 끈적거리는 아기손의 느낌.
엄마가 아이구구구 하면서 낮은 신음과 함께 돌아누우셨다.
난 준원이를 안아서 안방으로 가서 내 이부자리 위에 눕혔다.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네…짜식 또 놀래켜 줄까?
다시 아까 저녁때처럼 귀신흉내를 내며 얼굴을 흔들었더니
이 녀석이 이젠 내성이 생겼는지 좋아라 하면서
가까이 들이댄 내 얼굴을 쓰다 듬었다…하는가 싶더니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흔들어댔다.
오호라,한번 해보겠다 이거지.
조카와 둘이서 한참 그렇게 장난을 치고나니 나도 슬며시 잠이 오는데,
이 녀석은 여전히 말똥말똥 했다.
다시 마루에 나가서 분유가 들어있는 우유병에 아까 엄마랑 새언니가 했던것처럼
보온병에서 보리차를 적당량 따라서 흔들어서 가져갔더니,
우유병을 보자마자 지 밥통인줄 아는지입맛을 마구 다셨다.
병을 들이대기가 무섭게 두손으로 움켜쥐고 빨아제낀다.
양발은 번쩍 하늘을 향해 쳐든 채로.
“맛있어?” 우유병 안으로 기포가 생기는게 보였다.
“준원아,맛있어?” 여전히 쭉쭉 소리를 내며 우유를 들이키다.
“야,나도 맛좀 보자” 우유병을 뺏아서 한번 빨아보았다.
생각 외로 굉장히 힘들었다.
그냥 빨대로 음료수 먹는것처럼 쭉쭉 들이켜지는게 아니라
엄청난 힘으로 고무 젖꼭지를 빨아도 우유가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도 몇방울 맛을 볼수 있었는데,닝닝하니 뭐 별 맛도 없구만
아기들은 왜 좋아라 저런걸 먹을까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어른도 빨기 힘든 젖병으로 아기가 안간힘을 쓰면서 먹다니,
그러니까 힘이 딸려서 노상 먹고 자고를 반복하는게 아닐까
“준원아..빨랑 커라,그래야 더 맛있는 것 먹을 수 있지,
떡볶이며 하얀 팥고물 찹쌀떡이며,맛있는게 천지빼깔인데 너 너무 불쌍하다”
준원이는 알아 들었는지 그저 우유로 배 채우는게 행복해서인지
마냥 좋다고 미소 짓기만 했다. 나도 좀 입이 궁금한데 특별히 간식거린 없고,
준원이가 우유병을 감싸고 혼자서 행복해 하는걸 확인한 후 쏜살같이 부엌으로 다기 나갔다.
뭐 특별한 간식거린 없고,,
준원이 분유통이 식탁 한가운데 떡 하니 버티고 있었다.
냉큼 방으로 들고 들어와서 “준원아,고모가 니꺼 맛좀 볼께” 하고는
깡통 안에 들어있는 플라스틱 스푼으로 조금 맛을 보았다.
아까 보리차에 탄 닝닝한 맛과는 달리 약간 달콤하고 고소한 것이 맛있었다.
그래서 준원이가 우유병을 한 통 다 끝날때까지 같이 친구해준다고
조금씩 떠먹던 것이 나중에 들여다 보니 분유가루가 쑥 내려앉은게 확 보인다.
우유를 다 먹고 나더니 조금 칭얼거리길래 살살 가슴께를 두드려줬더니
스르르 눈을 감고는 조금 더 낑낑거리다가는 눈이 게슴츠레 풀리더니 잠이 들었다.
입가에는 먹던 우유가 약간 남아서 분홍입술 옆으로 우유가 조금 번져있다.
“자꾸 보니까 너도 밉상은 아니댜 얘”
나도 준원이 옆으로 길게 누워서 잠을 청했다.
자면서 준원이와 꿈속의 놀이동산을 뛰어노는 꿈을 꾸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단지 다음 날 아침 일찍,
”아이구 지지배 애 죽이겠네” 하면서
내 엉덩짝을 때리는 엄마 손길에 번쩍 잠이 깼다.
내가 자면서 한쪽 다리를 준원이 배 위에 올려놓고 자더란다.
“아니,애는 언제 여기다 델다놓고..저 분유통은 또 왜 여기 나와있어?”
“아이구 세상에,이 비싼 분유를 한통 다 퍼먹었네…”
알고보니 머리 좋아지는 IQ 분유란다.
"우리 어제밤에 친구됐거덩.
쟤가 아직 미성년자라서 건배할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우리 건전하게 분유로 건배하고 친구했으니까 고만 좀 하라구요.
아기들도 사람 보는 눈은 있는지,
내가 워낙 카리스마가 넘치는 인상이라 첨엔 좀 쭈뼛하더니,
자꾸 보니까 내가 진국이란걸 알았는지,어제 밤에 내가 타 준 우유 잘 먹구 잤다구.”
“카리스마? 칼있으마 겠지…어�거나 간밤엔 수고했다”
언제 나왔는지 큰오빠도 한마디 해주었다.
준원이는 여전히 씩씩 잘 자고,
새언니가 기저귀를 새로 가느라고 아랫도리를 벗겨도 세상 모르고 잠만 잤다.
“짜식,자꾸 보니까 정말 이쁘네..”
준원이와의 첫날은 서로가 힘 자랑하느라고
-내가 힘자랑 하느라고- 좀 힘들었는데,
만 하루도 안되어서 난 그 녀석의 이쁜짓에 두손 두발 다들고
준원이라면 껌뻑 죽는 고모가 되어버렸다.
우유 먹는 것,
트림 하는소리,
잠투정 하느라고 낑낑거리는 소리,
좋으면 헤헤헤 웃는 소리까지,
하나도 이쁘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우리 이쁜놈,고모가 너를 위해서라면 충성을 다 하마!
난 굳은 맹세를 했고…..
아직까지 그 맹세는 유효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