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말에 효자 가문에 효자 난다는 말이 내려오는 건 아마도 지켜본 사람들이 있어서일까?
참으로 궁금한 것이
그 효자라는..
그 효심이라는 것도
유전자를 통해 대를 이어 자손들에게
내려오는 것일까??
나와는 요한 씨가 단산면 公醫로 부임하고 있을 때인 1965년 결혼하게 되었고 자기가 어떻게 의사가 되었는지
그 이야기야 말로 장편소설이나
한 편의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는 듯 파란만장했다.
내 남편 요한 씨는 효자중의 효자였다.
너무나 곤궁한 집안에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세 살 때부터 온 동네
논일 밭일 뒷설거지로
주린배를 채우다가
열 네살때 시아버지께서
광산 막노동으로 취직 하실 때
광산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청소하는
청소부로 따라 들어갔단다.
시어머니는 방물장수로
동네방네 다니며
물건을 팔아 곡식으로
바꾸어 돌아올 때
머리에 이고 오는 무거운 곡식 자루가 내려 앉어
눈앞을 가려 한치 앞이 안보여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였는데
늘 요한 씨가 십리길을 마중을 나와 지게로 져 날랐다는 이야기는 함께 살 때 시어머니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 시절 집집마다 호롱불을
켜면서도 석유를 아끼느라
이른 밤부터 잠자리에
들 때였지만
광산의 의료시설에서
청소부겸 조수로 있으면서
열심히 일해 의사선생님의
신뢰를 얻었고 덕분에
밤새도록 100촉 전등불을
켜도 좋다는 허락을 해 주셔서
홀로 한자 공부를 시작했고
의사 선생님이 공부에 매진하는 열여섯 어린 소년을 예쁘게 봐서
서대문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형님댁으로 보내
그곳에서 병원 조수로 일 하면서
밤을 새워 공부를 하여 18살에 검정고시로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었다고 한다
곧바로
6.25 사변이 나자 징집돼서
병원에서 4~5년 동안
어깨 너머로 배운 상처치료
의료기구 소독을 할줄 아는
덕분에 의무병으로 복무하며
백마고지에서 부상군인들 치료를 돕다가 포탄에 복부관통상을 입어 재대하고 보훈수혜로 학비 면제가 되자 경희한의대 전신인 동양한의대를 응시하여 합격하고 불철주야 노력한 덕분에 한의사 국가고시에 합격을 하였단다.
그리고 새마을 운동으로
그 당시 40세 미만 한의사들이 서울대 병원에서 2년간의
수련을 통해 한지의사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무의촌 공의로 경북 안정면을 거쳐
단산면 공의로 근무하면서
나와 결혼하게 되었다.
참으로 인간승리 같은
요한씨의
지대한 노력의 결과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가난뱅이 청소부에서
대한민국의
으뜸가는 직업
한의사에 한지의사라는
입지에 까지 올라 섯음이 경탄스러웠다.
그 후 69년 서울로 이사를 와서 월세집에서 한의원을 개업하며 1년 만에 시부모님을 모셔왔고
어렵게 어렵게 봉투쌀을 사 먹던 시기를 지나고 한의원이 명성을 얻으면서 요한 씨는 어머니의 인고의 세월을 잊지 못해 밤늦게 까지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 드렸고 그 옛날 서너 개 밖에 없던 텔레비전 채널 돌려 드리느라
밤 12시까지 꼬박 어머니 머리맡을 지키고 있었다.
효자도 그런 효자가 없을 만큼
요한 씨는 효자중의 효자였다.
그런 시어머니 시아버님
돌아 가신지도 35년이 훌쩍 지났지만
평생을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로
육남매를 먹여 살리기 위한
어머니의 험난한 세상살이를
지켜봐 온 요한씨의 마음속 깊은곳엔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가슴아린 사모곡이 되어
어머이 ~
어머이 ~
우리 어머이~를 부르는
요한 씨의 음성이
아직도 내 귓전에
맴도는데
요즈음은 또 다른 요한 씨를
보는 게 너무나 신기하다.
2016년
요한 씨가 작고하신 후
나는 1년이면 6개월씩은
미국에 있는 3남매의 집에서 지내왔다.
아무도 없는 서울에서
혼자 지내는걸
아이들은 혹시라도 잘못될까 노심초사 걱정해서
자꾸만 미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러고 보니
미국생활이 벌써 8년째...
내 아들 내 딸이지만
그 8년 동안
어느 자식 하나라도
불편한 기색 없이
반겨 맞아 살뜰히
보살펴 주었고
며늘 아이들마저도 언제나
어머니 어머니 하며 살갑게 대해주니 그 고마운 마음
어디다 비길 수 있을까?
요즘 세대가 겪는
시부모와의 갈등을
모를 리 없지만
내가 이런 복을 누려도
될까 싶은 마음은
언제나 자식 며느리 앞에
무의식 적으로 나오는
말 한마디도
행동거지 하나도
조심하게 되는 건
모두가 가족들의
평화를 위해서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둘째는
일찍 근무가 끝났다며
요즈음 재미있는
한국드라마가
나오는 곳이라며
어머니 이 드라마 보셨어요?
저 드라마 재미있는데
보셨어요? 하면서
여기저기
방송채널을 찾아준다.
덕분에 파친코도
2부까지 모두 16개
스토리를
얼마나 감명 깊게
잘 보았는지..
요즈음은 NETFLIX의
지금 거신 전화는 ~
Disney의
조명 가게 등을
시청하는 중이다.
집집마다 내 방에는
최고 좋은 TV를 들여놔 주어
내 눈을 즐겁게 해 주고
삼 남매 집집마다 내 침대 메트레스는 두 번의 척추수술로 불편함이 없는
최고의 품질로 준비해 주었고
애비야
어미야
부를 때마다 살갑게 대답하는
예에~~~ 하는 여운 긴 소리는
가끔씩은 너무 행복해서
너무 고마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이렇게 아들딸 삼 남매
뿐만 아니라
며느리 손자 손녀들까지
아쩌면 이렇게
대를 이어 효도를 할 수 있을까?
내가 한 것이라곤
단칸 월세방 어려운 시절
때부터 20여 년 동안
그 어린 나이에도
효자인 남편의 마음 상할세라 시부모님
지극정성모신 것과
50여년 동안
조상님들 봉제사
충심으로 모신 것
밖에 없는데
이제 내 나이 80 줄에 자손들로부터
이토록 정성스러운
효도를 받게될 줄
알았더라면 시부모님께
더욱 잘해 드렸어야 할걸
하는 후회도 남는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기에
제 아버지가
어떤 효행을 한 건지
보지 못하고 자랐어도
부.전.자.전.
효자가문에 효자 난다는
옛 속담이
이토록 이치에 들어맞는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다
이 아름다운
효를 행하는 마음이
나의 아들과 딸과
내 손자 손녀들에게 까지
이어진 것에 감사하며..
특별히 이 세상에 둘도 없이
착한 두 효부 며느리에게
진심을 담아
내 며느리가 되어줌에
감사의 마음을 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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