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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5.중앙여관&상주여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5. 중앙여관 & 상주여관.

1. 중앙여관

젊은 시절 아버지는 마부들을 데리고 농촌을 다니면서 나락을 사들여 정미소로 넘기는 나락대상이었다고 한다

한번 나가시면 추수가 끝난 나락을 수매하느라 원거리까지 다니시느라 여인숙이나 주막집 신세를 많이 졌었는데 그때마다 지저분하고 더러운 이부자리와 상에 오르는 정갈치 못한 음식으로 무척 고생을 하셨고 언젠가 영주에서 제일 크고 깨끗한 여관을 차리리라 다짐을 하셨단다.

그리하여 나락중개상으로 많은 돈을 모으게 되고 마침내 남의 집을 세를 주고 빌려
아버지의 고향이름을 딴 소천여관을 개업하였고 깨끗하고 정갈한 음식으로 여관이 성업되자  중앙통이라 불리는 대로변에  큰 대지를  사들여 목수를 고용해 집을 짓고 중앙여관 이란 이름으로 개업을 하셨단다.

일제강점기에 개업한 영주에서 유일한 오성급 여관이라  위생검사를 나온 일본순사들이 보통 여관은 구두를 신은 체 집안을 돌아보았고 우리 집을 검사할 때는 마루며 방이며 얼마나 반질반질 윤이 났으면 무릎으로 긴 복도를 기어 다니며 검사를 했다고 불광동 언니가 알려줬다.

영주로 발령받아 우리 집에 장기숙식 하고 있는 고위공직자들의 이부자리며 음식도 신경 써서 그 시절 그 흔하던 빈대 한 마리도 없이 깨끗했고
음식재료는 일본인 상점에서 최고급으로 구해 요리사의 손길로 최고의 맛있는 음식으로 이름을 떨 쳤단다.

2. 상주여관

상주여관은 중앙통로 대로변
우리 집에서 직선거리로 200미터쯤 위쪽에 소재하고 있는 꽤 큰 여관이다

상주가 고향인 이옥강 씨는
족집게로 뽑은 듯한 가느다란
반달눈썹에 살결이 희고 강산 있어도 웃는 것 같은 눈을 가진 혈혈단신 살아 온 곱상하고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혼자 살면서 여관을 운영하기에 동네 돈 있는 남자들의 눈독에도 굽힘 없이 영업을 해 돈도 많이 벌었고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지경이었는데 어느 날 이미 부인을 셋이나 거느린 우리 아버지께 만나자고 전갈을 보내
자기 전 재산을 다 맡길 테니 남편이 되어달라고 먼저 고백을 했단다.

한 가지 조건은 자신은 수태를 해 본 적이 없어  자식이 없으니 내 친오빠 효덕오빠를 양자로 삼아 전 재산을 물려주고 싶으니 그 당시 나를 잉태하고 있던 엄마가 또다시 아들을 낳을지 누가 아느냐고  부인에게 둘째 아들을 양자로 준다는 허락을 받아 달라는 간청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아버지로부터 들은 엄마는 배 다른 형제들과 자라면서 스트레스를 받느니 차라리 상주여관에서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생활하는 게 낫다 싶어 허락을 했고 아버지와 오빠는 그 후 상주집에서 임금님 같은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사변 이후 이옥강 엄마는 오래도록  자리에 누워 지냈는데 가슴이 복록 하니 늘 가슴이 쓰리다고 누워 지냈는데 지금 생각하면 위암이 아니었나 싶다

상주집 엄마는 나이가 들면서 불교에 심취하여 이산면 흑석사 주지스님인 상호스님과 의남매를 맺고 젊은 시절 수많은 남자들로부터 거둬들인 수많은 재물들을 좋은 곳에 쓰고 싶다고
흑석사 주변의 많은 부지를 사들여 절에다 기증을 하고 돌아가셨다.

내가 결혼하고 3년쯤 뒤
아버지께서 요한 씨에게 흑석사에 기증한 땅이 상호스님 앞으로 되어있는지 아니면 조계종 종단 이산면 흑석사 사찰 앞으로 되어있는지 등기부등본을 떼어 보라고 부탁하셨는데 요한 씨가 등기부등본을 확인한 결과 이옥강에서 흑석사로 귀속된 걸 확인이 되었고 아버지 께서도 그 말을 들은 후 안심을 하셨다.

흑석사 주변 넓은 과수원에 복숭아가 열리면 집으로 보내주시던 상호스님 얼굴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고..

초등학교 때 우리 학교에서 흑석사로 소풍을 갔을 때 상호스님께 인사를 드렸더니 새로 지은 밥을 스님과 겸상으로 먹은 기억도 있다.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지 어깨가 으쓱한 소풍날의 아련한 추억이다.

이렇게 영주에서 첫손가락과 둘째 손가락에 꼽히는 이름난 두 여관을 거느렸던 50대 초반의 우리 아버지.
황청 다리 밑에 국궁射庭 을 만들어 바리바리 음식을 수레에 실어 나를 때 나는 언제나 지화자 하는 거 볼래 하며 수레에 올랐고 백사장에 돗자리를 깔고 기다리던 기생들이 나를 보면
사수어른 막내따님이라고 업어주고 안아주고 사랑도 독차지했다.

활시위가 명중할 때마다 깃발을 든 총각이 좌우로 깃발을 흔들면
장구소리와 함께 기생들의 지화자 노래와 춤사위에
풍류의 멋을 한껏 뽐내던..
영주 제일의 미남 쾌남 호남 이었던 그때가 바로
우리 아버지의 전성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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