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3.
3. 옛집의 추억.
중앙여관 옛집에는 앞마당 뒷마당이 넓어 아버지께서 온갖 화초로 화단을 꾸미셨단다.
나는 해방둥이 45 년 생이고 6.25 사변은 1950년에 일어났다니 사변 전의 기억들은 어린 내 기억엔 긴 복도를 통통거리며 뛰어다니던 대궐 같은 기와집에 대한 기억뿐이다.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언니가 영주국민학교를 갈 때도 교실에 따라붙었고 선생님들도 묵인할 만큼 사랑을 받았단다.
영주에서 제일가는 부잣집 막내딸 지금 같으면 수업 중인 교실에 동생을 데리고 간다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나는 늘 언니를 따라 학교에 갔고 집에 가고 싶다면 언니가 전화를 해서 이다바 영동이 오빠가 나를 업으로 왔다고 한다.
언니가 가는 모든 친구집을 업혀서 따라다녔고 동부국민학교를 다녔던 나의 오빠가 나를 업고 학교에 데려갔던 기억도 있다.
그리고 어느 날의 갑작스러운 기억은 집 앞 신작로에 국방색 당가에 얹혀 즐비하게 누워있는 부상병들..
동네사람들이 모두 나와 혀를 차고 구경하던 기억이 있다.
아마도 6.25 동란으로 부상을 입은 청년들이었지 싶다.
토막토막 생각이 나는
내 기억의 단편들..
우리 식구들의 모습은 안 보이고
그 큰집에는 엄마와 나만 남아
있었던 기억이 있다.
어느 날부터 우리 집은 수십 명.
아니 방방마다 꽉 찬 소년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고 여름이었던지 화단에 꽈리가 주렁주렁 맺힌 때였다
우리 집에 머무르고 있는 오빠들이 서로 나를 업어주려고 장께 뽀시를 (가위. 바위. 보)하면서 이긴 사람이 나를 업어주고 마당 한 바퀴 돌면 다시 가위 바위보로 이긴 사람에게 안겨주고 목마를 태워주면 오빠귀를 붙잡고 좋다고 깔깔대면 둥기둥기도 해주고
나중에 알았지만 그 오빠들이
가르쳐 준 노래가 김일성장군
어쩌고 하는 노래였다고..
어떤 오빠들은 꽈리 부는 법도
알려주고 나한테 잘 보여 한번이라도 안아보고 싶어 해서 나는 공주님처럼 나 하고 싶은 대로 이래라저래라 하며 오빠들을 내 맘대로 움직였다고 한다.
나중에 큰 다음 왜 우리만 남아 있었냐고 엄마한테 물어보니
우리 식구는 모두 우리가 재산을 희사한 이산면 흑석사 부근으로 이사를 했고 전쟁으로 모두 피난을 떠날 때 영주에 머물던 헌병대가 우리 집에 머물며 피난할 때 소개 해준다며 그 시절 40대 초반이던 엄마를 헌병대원
CIC? 밥 해달라고 붙잡았고 혼자 남기 무서웠던 엄마가 어린애랑 같이 있으면 해치지 않을 거란 생각에 엄마와 둘이 남겨졌고 낙동강 전선이 몰락하는 때 즈음 헌병대가 소문도 없이 후퇴하면서 우리 모녀는 남겨졌고 헌병대가 떠난 비어있던 집에 인민군들이 들이닥쳐 길가에 즐비하던 부상병들은 다 인민군들이었고 우리 집에도 인민군 소년병들이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고등학생 수준의 어린 소년병들 집에 두고 온 동생이 얼마나 그리웠을까 나를 그리도 예뻐 업고 안고 목마 태워주던 그 소년병들 얼굴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 게 이상하다.
나중엔 모든 사람들이 우리 집에서 떠나고 우리도 떠나야 한다며
머리엔 한 짐을 가득 인 엄마를 따라 이산면으로 가는 도중 황톳길 논둑 밭둑길로 다섯 살 어린 계집아이가 무명 바랑을( 집에서 만든 배낭) 지고 땀을 빼짝빼작 흘리며 다리 아프다고 챙챙대던 기억..
하늘에서 쌔앵 하는 B29 소리에
콩밭에 엎드리기 몇 번이던지 입술이 다 부풀어 터지고 배가 고파 못 걷겠다고 두 다리 뻗고 앉아 울면 엄마가 길가 우물에서 두레박으로 물을 길어 간장 한종 지를 타서 찝찌름한 간장물로 요기를 하며 다행스럽게 큰 이변 없이 이산면 가족과 합세했다.
*우리가 떠난 후
인민군 임시 야전병원으로 징발된 우리 집은 아군의 조준 폭격으로 폭파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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