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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복되십니다.향기로운선한목자

김대건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200705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찬미예수님 

1.어느새 7월이 되었습니다. 살다 보니 벌써 일년의 반이 훌쩍 지나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하는 말처럼 우리의 하루하루는 한달, 한달로 이어지고 또 일년, 일년으로 이어집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순간이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인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그 순간도 어느순간엔가 바로 내 옆에 있게 될 것입니다. 살아 있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기를 기도해봅니다.

2.지난 주간에 본당의 뜻있는 분들이 기부해주신 재난지원금을 갖고 토마스의 집과 요셉의원, 또 집창촌의 수녀님들을 방문하였습니다. 특히 집창촌의 수녀님들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노수녀님이 그 허름하고, 볼품없는 집에서 무려 35년을 사셨다고 합니다. 깜짝 놀라 아니 어떻게 이 어려운 곳에서 그 긴세월을 사시게 되었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젊은 시절에 이곳에 왔을 때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한 아이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은 그 아이들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데 아이들이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하였더니 아이들이 수녀님도 조금 있으면 떠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사람들의 사랑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사랑을 믿고 마음을 주었다가 그 사람이 떠난 뒤의 마음의 상처가 더 컷기 때문입니다. 수녀님은 어려운 본원의 사정속에서도 장상들에게 간청을 하십니다. 아이들을 위해서 10년만 있게 해달고 하였는데```` 지나고 보니 벌써 35년이랍니다. 우리가 미처 다 헤아리지 못하는 어려움과 고통속에서 수녀님들은 그 집창촌의 아이들과 함께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때로 속을 썩이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다 의연하게 직장도 다니고, 결혼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시면서 정말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십니다. 그 아이들이 잘못되었으면 이 사회가 얼마나 어두워졌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하기도 하시답니다.
그러면서 이곳에서의 세월을 생각해보면 딱 한가지 깨달음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무능함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신다는 깨달음이시라고 하십니다.

3.저는 수녀님의 깨달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순간 머리가 쭈뼛섰습니다. 순간적으로 저의 지나온 세월들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아! 나는 여태까지 정말 어리석게도 나의 능력을 가지고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하였구나! 하느님은 나의 무능력을 통해 당신의 일을 하시는데 나는 나의 능력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하였으니 그 많은 세월들이 어렵디 어려운 것이었구나! 나의 능력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었고, 결과적으로는 하느님의 일을 방해한 것이로구나! 참으로 마음속에 깊이 찔러대는 하느님 현존의 대화였습니다.

4.이곳 문래동에 와서는 생각이 좀 바뀌었습니다. 그래! 내가 주인이 아니지! 하느님이 이 본당의 주인이시지! 나는 다만 협조자, 도구에 불과한 것이지! 당신의 본당이니 당신이 책임지시겠지! 저는 조금이나마 저 자신의 최대의 약점인 완벽주의와 결벽주의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도록 마음을 비우고 비워봅니다. 물론, 살던 습관, 패턴이 있어서 잘 안되는 경우가 많죠~~~ ㅋ

5.오늘은 김대건 신부님의 축일미사입니다.우리나라의 초대교회사를 보면 하느님의 섭리를 깊이 느끼게 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우리 본당의 주보성인이신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계십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정약종의 아들이며 정약용의 조카입니다.1801년 신유박해로 아버지와 형이 처형되었고, 20세 때에 서울로 와서 박해로 흩어진 교인들을 다시 모아 교회의 재건을 위해 노력합니다. 1801년신유박해로 인해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처형된 후 한국 교회에는 성직자가 없었습니다. 정하상은 성직자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현석문 등과 함께 성직자 영입운동을 적극적으로 펼칩니다. 그는 우선 북경의 주교에게 성직자를 보내주도록 요청하기 위해 9차례나 국경을 왕래합니다. 이것이 여의치 않자 그는 교황에게 직접 청원문을 보내서 성직자를 보내주도록 요구하기에 이르렀다.그는 상재상서라는 귀중한 호교론을 남깁니다. 1801년부터 1831년까지 조선교회는 성직자가 없는 암흑의 시기를 보내지만 바로 그때 정하상 바오로성인의 평신도 지도자가 교회를 이끌어나갑니다.

정하상의 편지는 로마의 교황청에 전달되었고 마침내 1831년 당시의 교황 그레고리우스 10세는 그 편지를 보고 큰 감동을 받아 북경교구에 소속되어 있던 한국교회를 분리시켜서 조선교구의 설립을 선포하고 초대교구장으로 브르기에 주교를 임명합니다. 
6.한펀 이때 하느님의 섭리는 저 멀리 프랑스에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프랑스인인 모방신부는 1829년에 서품되었으며, 보좌신부로 사목하다가 조선교구가 설립된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이듬해 중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마카오로 떠납니다. 그러나 도중에 천주교 조선교구장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조선의 선교사가 되기로 자원하게 됩니다.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정하상 바오로의 혼신의 노력으로 조선교구가 설립되고, 그 결과로 조선교구의 주교가 임명되고, 그와 함께 하기로 한 이 모방신부가 다 쓰러진 조선교회를 살리는 초석이 됩니다.

 7.모방신부는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조선에의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국경의 감시가 심하여 만주에 머무릅니다.
그 후 브뤼기에르 주교가 병으로 선종하자, 그는 혼자 삿갓에 상복 차림을 하고 1836년 1월 12일  정하상의 인도로 압록강을 건너 입국하였고 15일 뒤에는 한양에 도착합니다. 그는 조선어를 공부하며 먼저 경기도와 충청도 교우촌을 방문하여 200여 명에게 영세를 주게 됩니다.

그는 언제나 전신에 상복 차림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는 한자에 능통했으므로, 주로 한자나 통역사를 통해 천주교 신자들의 고해성사를 들었습니다. 그와 그에 이어 입국한 샤스탕 신부는 누추한 움막에서 살며 산나물에 잡곡밥을 먹는 빈약한 음식 섭취 등 조선의 낯선 환경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8.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조선의 천주교 신도 수를 약 6천명으로 추산했습니다. 그 두 명의 선교사는 외딴 산간에 공소를  만들어 자주 그곳을 방문합니다. 각각의 공소에서 교리 교사를 임명하기도 합니다. 1837년 한 해 동안만 해도, 그들은 1,237 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2,087 명에게 고해성사를 들었으며, 1,950 명에게 영성체를 분배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천주교 신자 수를 6천여명에서 9천여명 이상으로 증가시킵니다.

9.모방 신부는 사목하면서 외국사람으로서의 한계를 느끼고, 조선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는 조선 천주교 사제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1836년 말에 세 명의 청소년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김대건 안드레아 그리고 최양업 토마스를 평신도 지도자인 정하상 바오로로부터 소개를 받아 신학생으로 선발합니다.

그는 신학생들에게 라틴어를 가르쳤고 그들을 마카오로 보냅니다. 젊은 신학생들은 8개월에 걸쳐 만주와 몽골 그리고 청나라를 거쳐 마카오에 도착합니다. 그들은 마카오의 신학교에서 공부합니다.

10.이때도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이 신학생들과 밀착하여 함께 생활을 합니다. 한양에서 기거하는 동안 숙식등의 온갖 편의를 봐주고, 그들이 떠날때에도 국경까지 동행을 합니다. 즉 정하상 바오로 성인은 김대건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탄생에 있어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 것입니다.

11.신학생들이 떠난 뒤에 모방신부와 샤스탕신부의 존재는 민중들을 비롯하여 관리들에게 까지 알려집니다. 조선 조정은 그 선교사들을 찾기 위해 많은 천주교 교인들을 고문합니다. 교구장이셨던 앵베르 주교는 자수하는 것이 교우들에게 미치는 박해를  최소화하는 것이라고 판단하고,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에게 자수를 권유하게 됩니다.  

12.1839년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9월 6일 홍주 근처에서 대기 중인 포졸들에게 자수하였으며, 9월 21일 한강변 새남터에서 앵베르 주교와 함께 참수된 후 군문효수됩니다. 그 때 조선에 들어온지 3년밖에 안된 모방 신부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이때 정하상 바오로 성인과 함께 김대건 신부님의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도 함께 순교합니다.

13. 3년이 지난 1842년에야 김대건 신학생은 조선의 1839년 기해박해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앵배르주교, 모방, 샤스탕신부님과 정하상바오로와 함께 아버지도 순교했다는 이야기는 젊은 김대건 신학생의 마음을 얼마나 찢어 놓았을까요? 더군다나 어머니 우술라는 거의 걸인이 되어 신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간신히 연명한다는 소식에 김대건은 밤새워 울었을 것입니다. 이 조선교회에 드리워진 암울한 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당황스러웠을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신학생은 좌절에서 다시 털고 일어납니다. 아마 이때 김대건신학생은 하느님의 섭리를 깊이 생각하고 새롭게 마음을 다지는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14.오늘은 김대건 신부님의 성소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은 바로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헌신적인 하느님사랑과 교회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교회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것임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정하상 바오로 성인의 신앙을 통하여 조선교회가 설립될 수 있었고, 주교가 임명되었고, 묘하게도 모방신부님이 함께 하셨고, 그 모방신부님에 의해 김대건 신학생이 선발되었고, 하느님 계획에 따라 서품된뒤 불과 일년만에 순교하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최양업신부님이 조선 방방곡곡에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게 됩니다.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