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7주 화, 20.02.25 두 번째 예고,누가 높으냐?
1.예수님께서는 갈릴레아 지방을 지나가시게 되었는데 사람들에게 알려지길 원치 않으셨다. 그것은 제자들을 따로 가르치고 계셨기 때문이다.
2.복음서의 행간을 읽어보면 예수님의 인간적인 마음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는 것 같아 새로운 재미와 흥미를 느낀다.
3.예수님께는 제자들이 매우 중요했다. 당신은 이제 떠나가실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당신의 사명을 이 제자들이 이어나가야 하는데 아직도 제자들은 눈과 귀가 열리지 않고 있다. 예수님으로서는 참 답답하셨을 것만 같다. 인간은 그리 쉽게 변화되는 것 같지 않다.
4.제자들에게도 결코 쉬운 여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때로는 엄청난 감동과 감사를 느끼기도 하지만 또 때로는 갈등과 회의를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부족함에 실망,좌절을 하기도 했을 것이고, 또 때로는 세상 모든 것을 얻은 것처럼 기쁨에 들뜨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속에 진리가 살아 숨쉬기까지는 그들 역시 치열한 내적인 영적인 투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5.너무나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특별 개인 훈련을 시키신다. 사람들 눈을 피해 제자들과만 시간을 보내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걱정이 많으셨을 것만 같다. 이 아둔한 제자들이 이 험악한 세상속에서 어떻게 제자로서의 사명을 수행할 것인가? 세상은 온갖 종류의 이리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들이 비둘기와 같은 순박함을 가진 채 어떻게 하면 그 이리들을 이겨나갈 수 있는 지혜를 가질 수 있을지 고민스러우셨을 것만 같다.
6.많은 가르침중에 오늘 또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을 하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조차 두려워한다. 베드로가 그런일이 있어서는 안된다고 벌떡 뛰었지만 그행동은 제자들의 마음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제자들은 아직 세상의 사람들이었다. 여전히 세상의 방법대로 예수님께서 권력을 잡고, 이 세상에 보이는 하느님 나라를 세울 것만을 마음속으로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그들 역시 어쩔 수 없는 세상의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7.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깨달음을 얻기 보다 누가 제일 높으냐는 논쟁에 빠지는 것으로 보아 아직도 그들은 멀고 멀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삶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제자들은 전혀 분위기를 감지하지 못한 채 이 세상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8.두번째 수난예고 바로 다음에 제자들은 “길에서 무슨 일로 다투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들은 길에서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투었기 때문이다.
왜 제자들은 서로 다투었을까? 복음서의 분위기를 보면 꽤 심각한 감정충돌이 있었던 듯 싶다.
이 모든 연관관계를 살펴볼 때 제자들안에는 서로에 대한 질투와 시기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9.제자들중에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 제자들은 제자들 안에서도 서로 주도권과 패권을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아마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유다가 아닌가 한다. 그는 사실 누구보다도 현실적인 메시아, 정치적인 메시아, 눈에 보이는 하느님나라를 추구하던 사람이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그는 머리가 잘 돌아갔고, 한편으로는 교활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새로운 이스라엘 건국이라는 야망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로마를 물리치고, 새로운 이스라엘, 능력있는 예수님께서 통치하시는 새로운 나라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힘이 최고였다. 힘으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새로운 세상에서는 걱정이 없을 것만 같았다. 모든 백성에게 빵을 충분히 먹일 수 있었고, 그 마음들은 항상 기쁨으로 가득차게 할 수 있을 듯 보였다. 평화와 자유와 평등으로 가득 찬 눈에 보이는 현세적인 나라가 그에게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언제부터 유다에게 재정권을 맡겼는지는 분명치 않다. 머리가 비상한 유다는 그 돈주머니를 관리하는 예수님의 총애를 받는 듯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너희중에 한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경고는 안중에도 없었다. 생각해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매일 매일 몰려드는 군중앞에서 제자들은 우쭐해질 수 밖에 없었고, 아마도 유다는 예수님을 가까이 뵙게 해달라는 몇몇사람들에게서 뒷돈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치솟는 예수님의 인기와 열광앞에 제자들도 뿌뜻한 마음이었고, 그 마음은 풍선처럼 부풀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돈과 명예와 권력이 눈앞에 보였는지도 모른다.
10.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시다. 제자들의 그 부푼 마음들, 그 방향이 잘못되어가는 마음들, 이 세상의 방식대로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마음들이 염려되었다. 그래서 제자들만을 위한 집중훈련을 실시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자세하게, 그들 수준에 맞추어 교육을 실시한다.
11.그러나 너무나 실망스럽게도 그 교육을 마친 다음 돌아오는 길에 제자들은 누가 제일 높은 사람이냐는 문제로 다툰다. 예수님의 특별교육은 성과가 없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엄청 실망하시고 힘이 빠지셨을 듯 하다. 당신의 죽음앞에서 제자들은 자리싸움을 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12.예수님께서는 인내심을 갖고 제자들을 불러모아 다시 재교육을 시키신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주 간단 명료한 말씀이시다.
13.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첫째자리는 다르다.
그 자리는 모든 이를 섬기는 이가 차지하는 자리라는 뜻이다.
모든 이중에서도 특히 어린이 하나, 당시의 어린이는 비천한 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다.
14.마태오는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생각을 바꾸어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그리고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라고 대답하신다.
15.어린이? 유다인의 사고방식에서 어린이는 힘없는 사람, 능력없는 사람, 가난하고 비천한 사람을 뜻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좀 다른 뜻을 갖고 있다. 바로 자기, 자아, 거짓자아가 없는 사람이다. 하느님의 뜻앞에, 하느님의 말씀앞에 바로 “자기”가 없어야 하는 것이다. 모든 아픔과 고통은 자기가 있기 때문이다. 자기 생각, 자기 감정, 자기 의지가 그리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생각, 감정, 의지는 진실이 아닌 경우가 많다. 거짓, 위선, 오해, 편견, 고집으로 둘러싸여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헛된 허상 때문에 힘들어 하는 것이다.오랜 세월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겹겹이 때가 끼여 있는 것이다. 가짜 자기가 진짜인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는 아직 있는 그대로이다. 어린이는 아직 위선, 포장, 분장이 되기 전의 상태이다. 진짜 자아를, 진짜 자기를 뜻하는 말씀이다.
이런 어른이 됨으로써 생긴 자기를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허상을 벗어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실체가 아닌 그림자를 벗어버려야 하는 것이다. 어린이는 포장되어 있지 않은 상태이다. 분장, 위장, 거짓의 상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것이다. 그런 어린이와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시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그 아름다운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짓과 위선, 포장과 분장의 가면들을 벗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바로 이와같이 헛되고, 거짓된 자아를 벗어던지고, 그 본래의 아름다움을 회복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보여진다.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자신을 버려야 한다는 뜻으로 보여진다.
16.헛된 나 자신, 가짜인 나 자신, 포장되고 분장된 나 자신,위선으로 가득싸인 나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위에서 벌거벗김을 당한 채 돌아가셨다. 그분의 모습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시다. 하나도 위장되거나, 포장된 모습이 아니셨다. 겉모습과 속모습이 똑같으셨다. 말씀하신 대로 사신 분이셨다. 그분의 벗겨진 모습은 인간적으로는 비참한 모습이셨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신 모습이셨다. 그 모습은 바로 거짓없는 사랑, 바로 그 자체이셨던 것이다.
17.나 자신을 벗어버리는 것, 부끄러운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것이 바로 새로운 창조의 시작인 것이다. 감추려 하는데, 더욱 더 싸매고 싸매는데, 아니라고 부정하는 상황에서는 하느님도 더 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나의 생각, 나의 감정, 나의 의지조차도, 내가 살아온 세월들, 그속에 쌓이고 쌓인 태도들, 습관들조차 아낌없이 버려야 내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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