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0월 15일
모두들 안녕하셨어요?
그동안 제가 정신 없이 바빠서 한동안 연락을 못드렸네요.
마지막으로 메일 드린 뒤로 벌써 한달 쯤 됐나봐요.
저야 항상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듯한 생활을 하니까 어제도 오늘같고
,매일 매일이 똑같아서실은 날짜 가는것도 잘 못느끼면서 살아요.
그나마 신랑이 월요일날 메릴랜드로 출근하면 목요일날 돌아오니까
신랑의 스케쥴로 주 중이구나, 주말이구나 하면서 살고있죠.
지난 일주일은 좀 특별했어요.
콩쿨도 하고,엄마랑 조카도 보고 왔거든요.
엄마가 시카고에 조카를 데리고 와계신지 한달이 다 되가는데 가 볼 틈이 안나서
이리저리 스케쥴을 만들어보는 중에 마침 미시간에서 열린 쿵쿨에 제 씨디를 보냈더니
1차 예선 통과했다고 2차,3차 콩쿨하러 오라고 연락이 왔더라구요.
제가 연주하거나 쿵쿨한다고 하면 엄마가 며칠씩 금식 기도 하는걸 알기 때문에
이번에는 몰래 콩쿨하고 뉴욕에서 곧장 시카고에 가는것 처럼 했죠.
제 머리 속에는 콩쿨에서 1등 한 상장하고 상금을 머리 위로 흔들면서
멋지게 시카고에서 상봉하리라 생각했었는데...
아쉽게 본선 입상으로 그치고 상은 받지 못했어요.
그래도 본선 입상자 들에게 조금이지만 다 상금이 주어졌구요,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노래를 하는지 실전에서 보고 배우는게 많아서
사실은 좋은 공부가 되었어요.
엄마한테는 뉴욕에서 일요일 아침 비행기로 출발하는걸로 애기해 두었는데
토요일 밤에 Final 을 연주회 형식으로 진행하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온거예요.
"집에 전화하니까 앤디가 받더라..어디니?"
"음...후배 음악회에 구경왔어" 거짓말도 술술 잘 합니다.
"앤디는 여태 '안녕하세요' 밖에 안배웠니? 그말만 백번 하더라...쯧쯧쯧"
"어..엄마,나 지금 좀 바쁜데....왜?"
참가자들의 노래가 다 끝나고 이제 입상자들을 발표한다고
무대 위로 다들 나오라고 안내방송이 나오는데...
.
"올때 말린 버섯 안먹으면 그것도 싸가지고 오고,
유나가 플륫 배우고 싶어하니까 네거 가져오고,
바지 줄일거 있으면 내가 재봉틀로 줄여줄테니까 가져오고......"
아이고..벌써 미시간에 와있는데 ...그냥 알았다고 하고 말았죠.
엄마가 내 1등 상금을 보면 아마 부탁한 물건 안가지고 왔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거라고 하면서.
그런데,제가 너무 기대를 했나봐요.
무대 위에서 그냥 "Finalist" 라고 호명이 되는데 살짝 열받더라구요.
그래도 미스코리아의 미소를 잃지 않고 미소를 머금고 있다가 내려왔는데
아...속 쓰려 죽는줄 알았어요.
그래도 속 쓰린건 잠깐이구요,신랑한테 전화해서
나 "파이널리스트 먹었어!" 하니까 너무 좋아해요.
당장 시부모님께 전화드린다고 하더라구요.
음...신랑은 제가 파이널리스트라고 자기 너무 행복하다고 그러는데,
제가 1등 했다 그러면 혈압 터져서 죽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전 역시 너무나 한국적인 현모양처 입니다.
신랑의 건강을 위해서 가볍게 파이널리스트만 했으니.
밤새 짐싸놓고 호텔 방에 누워있으니 잠이 안오더라구요.
신랑은 집에서 도시락 싸놓은거 전자렌지에 데워서 먹고 있는데
난 파이널리스트 하자고 여까정 하늘에 돈 뿌리면서 날아왔나 싶은게..
분해서 이를 갈면서 잤나 싶은데 벌써 아침 6시.
체크 아웃하고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 안에서 커피만 두어잔 들이키고...
콩쿨에서 입상만 했으니까 엄마한테 말 안해야지 했었는데
막상 얼굴 보니까 그렇게 안되더라구요.
"엄마...실은...나 콩쿨하고 왔어...그냥 입상자야"
"아이고 잘했다..그러게..어제 전화했는데 그 시간에 앤디 혼자 집에 있어서
부부싸움하고 니가 집 나간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콩쿨 입상했다니까 너무 좋다"
나 참..제가 아무리 한 성질한다고 부부싸움하고 집 나간줄 알았다니,엄마가 절 너무 모르네요.
"내가 집을 왜 나가,앤디를 �아내면 �아냈지..
어쨌든,상금은 얼마 안되니까 내가 레슨비 하고 엄마는 이 꽃다발 받으세용~"
입상자들에게 준 장미꽃다발을 호텔방에 두고 오려니까 세상에 예쁘게 태어나서
쓰레기통에서 죽게 하기엔 너무 불쌍해서 시카고까지 장미꽃을 데리고 갔거든요.
엄마는 풍수지리 같은것도 믿고,좋다는건 다 따라하는 편인데
어디서 들었는지 말린 꽃을 집에두면 죽은 생명을 집에 두는거랑 같다는 이야길 듣고는
절대로 꽃을 안 말리는데,이번에는 오빠네 부엌에다 걸어두시더라구요.
시카고에서 제가 한 일은 아침에 우리 유나 학교 갈때 엄마랑 같이 가서
운동장에 줄 서 있다가 유나가 교실로 들어가는거 보고 와서,
(아..유나는 우리 큰오빠네 딸네미예요..저랑 똑같이 생겼어요.)
제가 다섯살때 피아노 의자에 앉아서 앞니 하나 도망간 채 씩 웃고 있는 사진이랑 판박이예요.
이제 한국 나이로 여섯살인데 '노느니 공부한다"고 시카고에 다니러왔다가 학교 다니고 있어요.)
엄마랑 겸상해서 밥 먹고..엄마가 해주는 맛잇는 생선조림 며칠 동안 먹고..
무우를 밑에 깔고 매운고추 듬성 듬성 썰어놓고 오래 졸인 생선졸임을 제가 너무 좋아하거든요.
제가 간다고 오빠가 제가 들어가도 될만큼 큰 박스에 가득히 킹크랩을 주문해서
배가 터질정도로 크랩먹고..
유나 학교에서 돌아오면 "고모,나 한손으로 자전거 탄다~" 그러는거 다 지켜봐야 하고,
그러다가 넘어져서 손가락 조금 다치면 한 팔을 다 잘린것처럼 울어대는 유나 달래주다가,
엄마가 한국에서 바리 바리 싸온 옷들도 이것저것 입어보면서 패션쇼도 하고,
드디어 댄 브라운의 "천사와 악마"를 한국어 편으로 읽고 왔어요.
전 다 빈치 코드를 영어로 읽었는데,성질은 급한데 영어다 보니 얼마나 진도가 안나가는지
속 뒤집혀 죽는줄 알았거든요..그래서 꼭 천사와 악마는 한국어로 읽겠다고 맘 먹었는데,
마침 그 책이 오빠네 있어서 다 읽고왔죠.
뭐..다 빈치 코드랑 전개가 비슷한것이...살짝 울궈먹기 같았지만...
콩쿨할때 노상 같은 노래 들고 나가는 저나, 저자나, 역시 예술가 답다고 생각했죠 하하하.
오빠네 가니까 책들이 많아서 전 주로 하루종일 집에서 책만 읽다가 왔어요.
어제 공항에 나오는데 벌써 그제 저녁부터 고모 가지말라고 우는 유나를 살살 달래가지고
다섯밤만 자면 또 온다고 그랬는데..안 믿는 눈치예요..눈치가 빤해가지고..
제가 핑계를 대다가 유나가 써먹은 핑계를 댔더니 수긍하더군요.
딱 한번 유나가 한국 가자고 하면서 "꽃씨를 심어놨는데 새싹이 나왔는지 보러가자" 고 했대요.
그래서 저도 화분에 물을 줘야 한다고 했더니 "앤디가 것도 못해?" 하는거예요.
영악한 녀석이...
그래서 화분 옆에 꽃씨 심어왔는데 새싹 나왔는지 보고 온다니까 그럼 다녀오라고 하네요.
공항에서도 헉헉거리면서 서럽게 우는걸 떼놓고 왔는데...
5분있다가 오빠 핸드폰으로 전화해보니까
삼촌이 맛있는거 사준다고 했다고 벌써 고모는 잊어먹었더라구요.
뉴욕은 비가 와요.
이 비가 그치면 이제 성큼 가을이 올거 같네요.
오늘은 빨래 해놓고,겨울옷들 꺼내놓고,시간내서 유나 갖다줄 플륫좀 닦아놓고,
일주일 동안 제가 집을 비웠더니 앤디가 얼굴이 반쪽이 됐네요..불쌍한 우리신랑.
엄마가 킹크랩이랑 갈비 재어놓은걸 바리바리 싸주셨는데...아,저녁거리는 해결됐네요.
엄마가 해준 생선조림 다 먹고 무우만 냄비바닥에 몇쪽 남겨놓고 왔는데...너무 아쉬워요.
그것도 마저 먹고 오는건데..
아무리 먹어도 물리지 않는 엄마의 음식을 또 언제 먹어볼는지..
그래도 제손으로 밥 한번 해드리고 싶었는데,유나가 제 손을 꼭 붙들고 안놔줘서
시카고 있는 동안 엄마가 저랑 유나 뒷수발 다 해주셨어요.
엄마가 하루종일 집에서 적적해 하시거든요.
혹시 시간 나실때,엄마한테 이 멜도 좀 해주시고 금호동 소식도 많이 전해주세요.
11월에는 신랑이랑 1주일 다녀올거예요.
그때 엄마랑 사진 많이 찍어서 올려 드릴께요.
모두들 건강 조심하시고,
제가 혹시 콩쿨 갈 일 생기면 이번에는 꼭 미리 말씀드리고 기도 부탁드릴께요..
역시 성당아주머니들의 기도빨이 약빨인데 말이죠..
올해 독감은 아주 독하다고 하니까 시간 내셔서 예벙주사도 미리 맞으시고,
항상 행복하세요.
뉴욕에서 서 연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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