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3월 26일
모두들 평안하시리라 믿습니다.
그동안 너무 바빠서,그리고 너무 아파서 연락을 드리지 못했어요.
지난 주..그러니까 3월 18일 도니제티 오페라 "사랑의 묘약" 공연을 마쳤어요.
여러분들의 기도와 응원 덕분으로 별 탈없이 끝나긴 했지만,만족스런 공연은 아니었읍니다.
3월 5일날 있었던 큰 콩쿨에서 알러지를 동반한 기침감기가 시작되어서
열흘을 꼬박 침대에 누워서 사경을 헤매다가...공연을 포기하겠다고 까지 했는데
지휘자가 "너를 믿는다" 한 마디에 죽을 힘을 다해서 노래 불렀어요.
루르드의 성수도 마시고,레몬즙으로 가글도 하고,수지침도 맞고,약도 먹고,
꿀도 마시고...온갖 민간요법과 약들을 써보았는데,감기엔 역시 시간밖에 없더라구요.
기침도 너무 심하고 열도 너무 많이 올라서 의사 선생님은 폐렴같다고
가슴 엑스레이도 찍고...목소리는 하나도 안나오고...불안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금요일까지도 제가 소리를 제대로 못내니까 다들 걱정하는 눈치였는데,그래도 저를 믿어주시고
끝까지 함께하자고 격려해서인지 공연 당일인 토요일에는 원래 목소리의 반 밖에 안되지만
어쨌든 공연을 끝까지 끌고 갔읍니다.
2막에서 마지막 아리아를 끝내고 상대역 남자랑 포옹하면서 살짝 눈물까지 나더라구요.
"이제 나 죽어도 되죠?.." 제가 상대 테너에게 귓속말로 그랬을 정도였어요.
관객들은 제가 죽을만큼 아팠다는 걸 믿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저는 기침을 참느라고 아주 애를 먹고, 이때다...싶으면 합창하는 사람들 사이로 싹 빠져나와서
무대 뒤에서 다시 가글하고,꿀 마시고 살짝 무대로 돌아오고..
그야말로 007 작전이었읍니다.
노래하다 보면 별별 일이 다 생기죠...앞으로도 이런 일이 또 생기겠죠.
좀 더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다시 한번 생각했읍니다.
리허설 하는 동안 둘카마라 역을 맡았던 바리톤 가수가 시간 약속을 잘 안지키고,연습을 제대로 안해서 다른 가수로 교체되기도 했었고,
벨코레 역을 맡은 가수는 목소리는 너무 좋은데,어찌나 공부를 안하는지 (아님 못하는지)
우리 다른 가수들이 데리고 앉아서 나머지 공부를 가르쳐야 할 정도였어요.
리허설이 제대로 진행이 안되서 어찌나 화가 나는지 (제가 또 한 성질 하쟎아요)
속으로 벨코레 역의 가수를 굉장히 미워했는데..막상 공연때는 제가 너무 못해서,
아무래도 벌 받은것 같아서 다시 한번 "착하게 살자" 라고 결심했읍니다.
제가 공연한다고 시카고에서 큰오빠도 일부러 보러 오고,버지니아에서 시부모님도 오시고,
볼티모어에 사는 친구들도 3시간을 운전해서 와주고,맨하탄의 성당에서도 여러분들이 오셨어요.
우리 신랑은 맨날 잘했다고 하니까 제가 이젠 믿지도 않구요,
시부모님은 너무 흥분하셔서 저보고 "디바" 라고...아...죽고 싶었어요.
볼티모어의 친구들은 싸인을 해달라는 둥..염장을 지르고..
누구보다도 제 자신이 만족하지 못한 공연이라서 안그래도 속 상한데,자꾸 잘했다고 하니까
비웃는것 처럼 들리고,정말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더라구요.
오직 큰오빠만이 따끔하게 채찍질 해주었어요.
"오늘 잘했다..근데 다음엔 컨디션 조절 잘 해서 더 잘해라.."
제가 살짝 변태인지,잘했다는 말보다 더 잘하라고 채찍질 해주는 말이 더 듣기 좋더라구요.
오빠가 허리를 살짝 삐끗해서 편하게 뉴욕 관광하기가 여의치 않아서 화요일 아침에 돌아가고
시어머니도 화요일 오후에 가시고나니까..그제서야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면서
좀 눈물도 나고,허무하기도 하고,제 자신이 너무 작게 느껴지고...
산후 우울증이라는 거 있쟎아요..
저희 가수들은 공연이 다 끝나고 나면 "공연우울증" 이 있어요.
자신의 연주에 만족하는 가수들이 몇명이나 될까요...너무 아쉽고,리허설 하면서 힘들었던 기억도
새롭고,가사 외우느라고 밑줄 쫙쫙,야광펜으로 하이라이트 주고,컨닝페이퍼 만들어서
가지고 다니면서 외우고...그렇게 노력했던게 다 허무하고 그렇습니다.
그런데다 식구들이 모두 아파서 정말 잠이 안옵니다.
엄마가 이틀전에 큰 수술을 하셨어요..처음엔 대장암 인줄 알고 모두들 식겁했는데
다행히 암은 아니고..어쨌든 수술이 필요해서 3시간에 걸쳐서 수술하고 앞으로 석달정도
절대 안정하셔야 한다고 합니다.
엄마는 아파도 별로 내색을 안하는데,그래서 오히려 병이 깊어진 것 같습니다.
수술을 받고나서 병실로 전화했더니 하나도 안 아프다고 하시는데,
새언니 말로는 엄마가 너무 잘 참아서 간호사 분들이 모두 감동하셨다고 하네요.
옆 침대의 환자는 무통 주사 놔달라,여기가 불편하다 하면서 시간마다 간호사를 호출하는데
우리 엄마는 그저 누워서 끙끙하면서 참고만 있답니다....에구...
또 아버지는 4월 6일날 백내장 수술이 잡혀있구요..
자식이 셋이나 되어도 모두 밖에 나와있고,아무도 병실을 지켜드리지 못해서 너무 마음 아픕니다.
오로지 우리 새언니가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병간호하랴,수술 예약하랴 바쁩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까 심각하게 신랑이랑 얘기했어요.
신랑은 기타랑 영어 가르치라 그러고...저는 그냥 부모님이랑 하루 종일 얼굴 보면서 지냈으면
좋겠읍니다.
근데 신랑마저 자꾸 배아 아프다고 해서 혹시 신장결석인지 의심스러워서
내과에서 진찰받고 어제 소노그램 찍었는데,지금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걱정스럽습니다.
백년만년 살면서 나 호강시켜주고,우리 부모님이랑 같이 살 큰집 지어주겠다더니
저렇게 아프다고 하니...
신랑도 미워 죽겠읍니다.
저도 모르게 "에이 씨...몰라~~" 하고 자주 투정을 부리니까,신랑도 "몰라,몰라" 따라하는데
하나도 안 귀엽습니다.
정말로 잔인한 3월입니다.
지난 월요일이 미국달력으로는 "First day of Spring" 이었어요.
계절로는 봄이 분명한데,아직 쌀쌀하고...제 마음에는 아직 칼바람이 부네요.
오랜만에 소식 전하면서 우울한 소식만 잔뜩 전해드려서 너무 죄송합니다.
저희 엄마가 빨리 회복하실 수 있도록 기도해주시고,
아버지가 이제 연세도 높으신데 백내장 수술을 하신다니 너무 걱정스럽습니다.
많이 기도해주시고,두 분 모두 수술 잘 받으시고 더욱 건강해질 수 있도록 많이 많이 기도해주세요.
제 우울한 기분은 금새 사라질 거예요.
사랑의 묘약이 정말로 제 맘에 들 정도로 성공적이었다면,지금쯤 저는 아마 콧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아져서 거만해져 있었을거예요.
항상 겸손하고 노력하라는 뜻으로 제게 이런 경험을 하게 하신 것 같네요.
더욱 노력하고,더욱 겸손하고,더욱 착하게...최선을 다하느 가수가 되겠읍니다.
재물을 잃은 것은 일부분을 잃은 것이요,
명예를 잃은 것은 절반을 잃은 것이요,
건강을 잃은 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다.
아버지 한의원에 있는 글 입니다.
아파도 꾹꾹 참다가 큰병 만든 우리엄마 처럼 되시 마시고 미리 미리 건강 챙기세요.
제가 창피함을 무릅쓰고,제 공연이 만족스럽지 못했다고 여러분께 알려드리는 것은
이렇게 말씀드리면서 다시 한번 제 자신을 돌아보고,다시 한번 더욱 마음 다잡고,
다음에 여러분께 노래를 들려드릴 때에는 더욱 발전되고,진실한 노래를 들려드리기 위한
저 자신과 또 여러분께 약속 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한 저를 위해서 기도해주시고,
저희 부모님 위해서 기도 해주세요.
모두들 안녕히..
서 연준 글라라 배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