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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대집에 숨겨진 참담한 현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33.새 집으로 이사를 하고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기뻐한 것이 언제나 마당 한귀퉁 이에 지독한 냄새를 피우고 서있던 재래식 화장실을 벗어나 물만 내리면 뽀얀 변기바닥에 깨끗한 물이 고인 수세식 좌변기가 있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기쁨이었다.시아버님 께서는아침저녁 두레상 앞에 모여 식사할 때마다 니들이 누구 때문에 지금 이 호강을 하고 있는 줄 아느냐고.. 할애비 잘 둔 덕에 좋은 집에 사는 거라고.. 내가 발품을 얼마나 팔아가며 찾아낸 이 집 때문에 니들이 호강하고 있다고.. 마치 당신이 당신 돈으로 집을 사 주신거나 진배없이 앉으나 서나 누구 덕인지 아느냐고...정말 아침저녁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시아버님의 호호 탕탕 큰소리에는 남편 요한 씨도 말.. 더보기
꿈에 그리던 내집을 드디어 마련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32.60년대 질곡의 삶을 살아왔던 내겐 백만장자란 감히 살아서는 꿈도 꾸지 못할 딴 세상의 것이었다.결혼했을 65년도 영주시의아담하고 살기 좋은 25평쯤 되는 신축주택의 가격이 20 만환 정도였으니 그 당시 100 만환의 돈을 비축해 놓은 사람이야 말로집 다섯 채 값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으니 그 가난하던 시절 보통 사람들은 백만장자라는 말의 위력도 느끼지 못했을 때다.1973년 결혼하고 9년 만에..천신만고 끝에 십원 한 장도 발발 떨면서 모은 돈이 200여만환이제 우리는 귓전 너머로 듣던 백만장자가 아니라 이백만 장자의 반열에 들어섰기에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이 현실이 꿈인지 생시인지 우리에게 찾아온 평생에 3번 있다는 대운이 찾아온 것에 반신반의하면서 우리가 그토록 염원 .. 더보기
백만장자의 꿈.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311971년..금호동으로 이사하고 2년이 지날 무렵부터 요한 씨가 운영하는 한의원은 공의생활로 익힌 양방진료와 한방을 겸한 세심한 진찰과 자상하고 친절한 설명으로 환자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8 식구의 대가족을 책임져야 했던 요한 씨는 좁은 한의원에서의 갑갑함을 덜어내고 주변 금호동 사람들과의 안면을 익히기 위해 일요일이면 동호회를 따라 낚시를 다니면서 금호동의 내로라하는 터줏대감들과 교류를 나누기 시작했다.3년 전에 개업한 40살의 젊은 한의사가 좁은 금호동에서 조금씩 이름을 떨치면서 환지가 늘어나기 시작하자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금호동에서 골목 안에서 오랜 세월 침술로 유명했던 X산한의원이 동업하던 동업자가 남편과 동창이었는데 동업을 접고 길가의 .. 더보기
그해 겨울은 앵클부츠 가 있어 행복했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30.큰애가 유치원을 입학한 그해 가을 나는 점점 더 많은 일에 쌓여 잠시잠깐도 쉴틈이 없었다.거의 7개월 동안 밤낮이 바뀐 딸이 낮동안은 늘어지게 자면서 저녁만 되면 울어 제키는 거였다.업어도 보고 안아도 보아도 막무가내로 울어제키는 딸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 나는 누구 하나 도와주지 않는 더구나 폐결핵으로 고생하는 식구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게 온전한 정신이 아니었다.꼬챙이처럼 말라가는 내게 요한 씨는 산후풍에 먹는 보약도 다려주고 이제 밥 굶을 걱정은 하지 않을 정도가 되니 애기보는 처녀라도 하나 구하려고 사방에 도움을 청했더니 마침 큰언니가 밥만 먹여달라는 집 처녀가 있다고 연락이 왔다.언니네 앞집에 사는 은심이 사촌이라며 너무 가난하니 입이라도 던다고 아주 예쁘고 온.. 더보기
성동유치원과 털신 에 담긴 추억.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9.71년 봄..이웃의 큰아들 친구들이 유치원을 간다고 했다.내 어린 시절 우리 집과 담장을 면한 영주 중앙교회 마당 한쪽에는 유치원이 있었다.6ㆍ25 사변 후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던 친정집이 조준폭격으로 무너지고농지개량 으로 논밭마저 경작하던 소작인들에게 다 빼앗긴 우리는 상상하리 어려운 만큼 최악의 몰락상태여서나는 늘 교회마당에서 혼자 놀며 유리창 안을 통해 노래하고 무용하는 유치원 아이들을 늘 부러운 눈으로 보아왔기에 환자들이 조금씩 늘어 양식걱정은 안 해도 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아들에게는 유치원을 보내고 싶었다.동네의 아들친구들이 다 유치원을 간다니 다섯 살부터 혼자서 한글을 깨친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요한 씨도 유치원 입학을 선뜻 응락해 주었다.신명.. 더보기
가족에게 덮친불행 폐결핵. 지금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8.71년기나긴 겨울이 지나고 드디어 봄소식을 전해주는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리는 춘삼월이 왔어도 어머니의 기침은 멈출 기세가 보이지 않고 밤새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시부모님의 기침소리가 마음이 쓰여 아침저녁으로 모과차와 한약을 달여 드렸지만 별효험이 없는 가운데 요한 씨 까지도 간간히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아침 점심 저녁을 안방에서두레상을 펴고 식사를 하면서 식구대로 돌아가며 기침을 해대니 요한 씨가 시아버지께 독한 봉초담배를 제발 끊으시라고..그 좁은 방 환기도 제대로 안 시키면서 밤늦게 까지 피우는 독한 담배연기 때문에 계속기침을 하게 되는 것이고 집단으로 감기에 걸려 고생하게 되니 제발 담배를 삼가하시라고 말씀드렸다.젊어서 50대까지탄광 노동부로 일하시면서 규폐증.. 더보기
미국인 이웃의 뜻밖의 배려. 2025.2.13. 목요일. 윈디 시카고의 겨울은 매서운 칼바람으로 유명한데 눈이라도 내리는 날이면 모든 학교는 수업이 중단되고 휴교령이 내린다..수요일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하루종일 그칠 줄을 모르고더구나 수요일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날이라 집집마다 도로에 면한 진입로에 쓰레기 통을내어 놓는 날이다.미국의 쓰레기 통은 한집에 2개씩 일반적인 폐기물과 음식물등을 혼합해서 넣는 쓰레기통과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통으로 구분되어 있고 어른 두 명이 들어갈 만큼여유가 있는 대형이지만 뚜껑에는 손잡이가 ..아랫쪽에는 바퀴가 달려 있어 누구라도 큰 어려움 없이 운반할 수가 있는데 수요일 아침 7시 출근하는아들이 도로변 주차장진입로에 가져다 놓고 출근했다.우리 동네 일반 쓰레기 수거차는 오후 2시 30분쯤재활용 수거차는 3시 30분쯤스.. 더보기
모과차를 만들던 가난했던 시절.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7.70년 12월초겨울의 추위가 시작되고집안 식구들은 방구들이 식을까 솜이불을 깔아놓고 생활했다.아기 기저귀를 빨아 널면 순식간에 뻥뻥 얼어버리는 엄동설한..그때부터 시어머니의 해소기침이 시작되었다.계속되는 잔기침은 젊어서부터 겨울이면 시작되는 해소기침 이라고 했고 아무리 좋은 약을 다려 드려도 좀체가시지 않는 기침으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니가 안타까운지 요한씨는상시로 음용할수 있는모과차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시집올 때까지 친정엄마가 해주는음식만 먹었고 밥 한 번도 제대로 지어본 적 없던 나는 일곱 식구 살림도 없는 지혜를 짜 내야 했고 갑자기 모과차를만들어 내라니 그냥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요한 씨가 주는 돈으로 모과 다섯 개를 샀지만 한 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모과차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