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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모과차를 만들던 가난했던 시절.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7.

70년 12월
초겨울의 추위가 시작되고
집안 식구들은  
방구들이 식을까
솜이불을 깔아놓고
생활했다.

아기 기저귀를 빨아 널면
순식간에 뻥뻥 얼어버리는 엄동설한..
그때부터 시어머니의
해소기침이 시작되었다.

계속되는 잔기침은
젊어서부터 겨울이면
시작되는 해소기침
이라고 했고
아무리 좋은 약을
다려 드려도 좀체
가시지 않는 기침으로  
고생하시는 시어머니가
안타까운지 요한씨는
상시로 음용할수 있는
모과차를
만들어 보라고 했다.

시집올 때까지
친정엄마가 해주는
음식만 먹었고
밥 한 번도 제대로
지어본 적 없던 나는
일곱 식구 살림도
없는 지혜를 짜 내야 했고
갑자기 모과차를
만들어 내라니
그냥 머리에 쥐가 날
정도였다.

요한 씨가 주는 돈으로
모과 다섯 개를 샀지만  
한 번도 만들어보지 못한
모과차는 어떻게
만들어야 할지 묻는 내게
우리 부모님이
선견지명이 있으셔서
이럴 때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 오신 게 바로
돌절구 아니겠냐며
모과를 절구에 찧어
즙을 내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어 놓았다.

그런데 절구공이가 없는데
무슨 수로  찧느냐고 하니
각목 하나를 구해주며
이걸로 한번 해 보라고..

지금 같으면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얇게 썰어
설탕이나 꿀에
절여 놓으면 된다는 걸
알고도 남는데
그때는 나이가 어려
시키는 대로
무식하게도  
돌절구에 반쪽낸 모과를
넣고 찧으니 이리저리
튕겨 나가기 일쑤고
그나마 모서리 부분이 있어
조금씩 갈라지기에
하루 온종일 추운겨울
담요로 감싼 아기를
등에 매단 채 댓돌에 앉아
절구질을 하자니
아기는 힘드는지
일어나라고 발버둥치고
양쪽 팔이며 어깨가
절구질로 빠지는 듯..
산후풍도 채
가시지 않았는데
하루종일 절구질하는 통에 현기증으로
눈앞이 가물가물 해졌다.

대여섯 시간을 입술이
피가 맺히도록
이 악물고 절구질로
고생 고생을 했는데도  
그놈의 모과즙이란
아무리 짜고 또 짜내도
한공기도 나오지 않는  
헛고생 한것이
너무나 억울하고 분해서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지금 생각해도
모과는 수분이 별로 없는
과일인데 요한 씨도
그때는 그걸 몰랐는지...
그저 곱게 짖 찧으면
배나 사과처럼
모과즙이 주루륵 나오리라
생각한 것 아니었을까?


그래도 그 고생을 하며
절구질하는 내게
손바닥만 한 유리로
바깥을 내다보시던
시어머님이
아가 날 저물어 가는데
이제 그만하거라..
하시는 소리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는데
저녁밥을 지으러 일어나다가
그만 옆으로 쓰러진 것이
무릎아래는 꼬집어 뜯어도
아무런 감각이 없어
아기를 업은 채로 쓰러져
기절하듯 꼼짝 못 하는
엄마가 다친 줄 알고
울어 재키는 두 형제를 보고
놀란 남편이 뛰어나와
침을 놓아 사관을 틔우고
다리를 한 시간이나
주무른 끝에
겨우 일어나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때는 누구나 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기에
힘든 생활에도
한 번도 누구를
원망해 본 적도 없고
조금 특별한 시부모님과
효자남편과 사는 며느리는
모두 나처럼 사는게
당연한 걸로 알고 살아온
그저 남편 말이라면
하늘같이 받들고 살아온
곤궁한 시절이었다.

그날 이 후
남편 요한 씨는
돌아가실 때 까지
모과차 때문에 고생한
나를 보기 미안 해서인지
허구많은 과일중에
하필이면 왜 모과차냐고
모과차란 소리만 들어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듣기 싫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