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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성동유치원과 털신 에 담긴 추억.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9.

71년 봄..
이웃의 큰아들 친구들이
유치원을 간다고 했다.
내 어린 시절 우리 집과 담장을 면한  영주 중앙교회 마당 한쪽에는 유치원이 있었다.

6ㆍ25 사변 후
인민군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던 친정집이 조준폭격으로 무너지고
농지개량 으로 논밭마저 경작하던 소작인들에게 다 빼앗긴 우리는 상상하리 어려운 만큼 최악의 몰락상태여서
나는 늘 교회마당에서  혼자 놀며 유리창 안을 통해 노래하고 무용하는 유치원 아이들을 늘 부러운 눈으로 보아왔기에 환자들이 조금씩 늘어 양식걱정은 안 해도 되니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아들에게는 유치원을 보내고 싶었다.

동네의 아들친구들이 다 유치원을 간다니 다섯 살부터 혼자서 한글을 깨친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서 요한 씨도 유치원 입학을 선뜻 응락해 주었다.

신명이난 나는 유치원을 찾아가서 입학원서를 쓰고 원복에 베레모도 맞추고 하얀 타이츠도 준비하고 유치원 가방도 준비했다.

집에서 큰길로 300 미터쯤
그리고 좁은 오르막을
300미터쯤 한참을 걸어 올라가면 금호동 로터리 못 미쳐에 소재한 성동 유치원의 넓디 넓었던 마당은
그네와 시소 등 놀이 시설이 완벽하게 배치된  꿈 속에서나 그리던 유치원에 아들을 입학시킬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그때 성동 유치원은
꽃밭과 나비반 그리고
병아리 반으로 3개의
클래스가 있었고
아들의 친구들은 모두가 꽃반
6살이던 아들만 나비반이었다.


입학식날..
초록색 원복을 입은 오동통
귀엽기 짝이 없는 아들을 앞세우고..
나는 꽃무늬 월남치마에  옅은 브라운 털스웨타로 단장을 하고 하늘색 꽃무늬 포대기에
막내를 둘러업고 입학식에 참석해서 보니 애기 손 잡고 온 사람들도 있었지만 포대기에 애기를 둘러업은 건
나 혼자 뿐이었다.

입학식날 만큼은
시어머님이 잠시 애기를
봐주실 수도 있건만..

그런데 가장 큰 일은 한 번도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아들이 사람들로 웅성거리는 낯선 분위기 속에 엄마와 분리되어 있으니 엄마가 눈앞에서 사라질까 두려워 입학식 내내 선생님과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의자에서 돌아앉아 엄마만 찾는 거였다.

입학식이 끝나자 부부가 같이 참석한  학부형들이 이곳저곳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유치원 곳곳에서 단임 선생님을 모시고 입학 기념사진을 찍느라고 분주하였지만 우리 모자는
쓸쓸히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그때는 월세집에 살면서 금호동에서 제일가는 유치원에 보낼 수 있는 것 만도 감사했고
사람들이 가진 카메라는 감히
꿈도 꾸지 못할 딴 세상의 것이라 치부하고 살았었다.

그 후..
자모회가 있을 때나 생일 잔치때 마다
입고 갈 옷이 없던 나는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갈 수 있는 게 나 자신의 초라함을 가릴수 있는 제일 좋은 방편임을 알았고
자모들이 신고 오는 구두와는 달리
내 털신발을 남들에게 보이기 싫어 언제나 아기가 실내에 들어가면 운다고 핑계를 대고 교실 문밖에 서 있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나이 같으면
털신이 뭐가 어때서?
하며 하나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겠지만 가난하던
스물여섯 살  나이 어린 엄마였던 내 눈에는 유치원 신발장 안에 놓여있는 반짝반짝 빛나 는  구두틈에 끼어있는 노란 털을 두른 털신이 왜 그렇게 창피하게 느껴지던지..

그래도 조금씩 형편이 좋아지고 있으니 그때가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나도 구두를 신을 날이 오겠지 하는 희망을 가지고 아쉬움을 달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