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19.
퀴즈..
생각해 보면 나는 퀴즈와는 찰떡궁합이었던 것 같다.
65 년 요한 씨와 결혼하여
단산면 공의 진료소에 살 때
우리 동네에 나의 8촌 언니가 살고 있었다.
형부가 옥대국민학교에
교편을 잡고 계셨고
8 촌 언니보다
처제만나는게 즐겁다고
형부가 더 자주 오가며
친숙하게 지냈었다.
그해 여름이던가
신문에 퀴즈가 나왔는데
퀴즈의 정답은 교사이던 8촌 형부가 알아냈고
그 정답을 단산면민
모두가 공유하여
신문사로 정답을 보냈는데
한 달 후 정답 추첨
3등 트랜지스터 라디오
당첨자 난에
단산면 공의진료소
내 이름이 덜컥 붙어버렸다.
그 당시 부자집 이나 가지고 있던 라디오는 결혼하여 신혼집에 가서보니 요한씨는 제니스라는 커다란 4 각의
상자같은 틀속에 고정된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고 저녁이면 식구들이 동네사람들과 둘러앉아
연속 방송극을 듣고 있던 터라 어디던지
낚시터든 들녘이든
들고 다니며 들을 수 있는
손아귀에 쏙 들어오는
앙징맞게 생긴
트랜지스터라는 라디오는
신 개발품으로
촌 구석인 단산면에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신 문물이었던 것이다.
트랜지스터가 집으로
도착되던 날
단산면민 대부분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보기 위해
공의 진료소로 몰려들었고
동네 사람들에게
한턱 두 턱 내다가 집안 기둥뿌리까지 뽑힐뻔한
대 사건이었었다.



그리고 1969년
서울로 이사후
조금씩 자리가 잡히자
큰 맘을 먹고
월부아저씨를 통해 세운상가 어디에 있는 상점에서
그 당시 도시바 텔레비전을
24 개월 월부로 들여놓았다.
네 살 두 살 어린 형제는
텔레비죤 이라는
신 문물에 놀랐고
채널 3개인가 있었던
텔레비전은 아침 몇 시부터
저녁 몇 시까지
애국가와 함께 시작되고
애국가와 함께 끝이 났었다.
그때 텔레비죤에 나온
퀴즈를 정답을 적어
우채국에 가서
우편엽서로 방송국에
보내놓고는 잊어먹고 있었다.
그러고 보름쯤 후 아침
둘째 동서가 전화를 했다.
지금 테레비를
보고 있느냐고 해서
애들 밥 먹이느라 테레비는
안키고 있다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흥분된 목소리로
아이구 형님
모르고 계셨구나
형님 축하드려요..
하는거였다.
영문도 모르는 축하전화에 축하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의아해한 내게 시동생이
전화를 바꿨다.
형수님 축하드립니다.
우리 둘이 지금
아침식사 하는 중인데
강산한의원 이름이 나와서요.
형수님이 퀴즈 1등에 당첨되었다고 발표가 났어요.
별표 전축이에요.
그 유명한 천일사의
별표 전축에 형수님이 당첨되었어요.
축하 축하드립니다.
하는 것이다.
놀란 남편이 수화기를
빼앗아 들고 다시 확인해도
내 이름이 1등 당첨자에
올랐다고 하니 천지가
뒤집어질 노릇이었다.
별표 전축이라니..
우리 형편에 꿈도 꾸지 못할..
내로라 하는 부자들도
성큼 들여놓지 못 할
최 고가의 전축에
당첨이 되었다니..
이게 정녕 꿈은 아닌지
볼을 꼬집어봐도
아무 감각이 없었다.
그때 청와대 경호원으로
육영수 여사의 경호를 맡고 있던 둘째삼촌이 을지로에 있던 천일사로 전축을 찾으러 가는데 동행했고 천일사 에서는 전축을 가져가려면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해서 준비 없이 갔다가
빈손으로 돌아와
그 며칠 후 세금 낼 돈을
마련 한 후 다시 가서
1등 상품을 찾아왔는데
삼륜차에다 싣고 온
별표 전축은
그 당시 부잣집들은
호마이카장롱에서
티크장롱으로 옮겨가던 시절이었는데
세상에나..
별표 전축의 티크로 짠
장식장 모양의
아름답고 우아한 자태에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난생처음 마누라 덕분에
대한민국 최고의 음향기기
최고급 전축을 가지게 된
남편은 고맙다고 나를 업고
안방을 한 바퀴
빙빙 도는 일까지..

그러고 1년 후쯤
또다시 퀴즈 정답을 보낸 것이 또다시 2등에 당첨되어 브라더 미싱을 상품으로 받게 되었다.
별표 전축보다 밝은 색의
티크장식의 드레스 미싱은
사용할때는 상판을 열어
미싱을 들어 올려 사용하고
쓰지 않을 때는 장 안으로 접어넣고 상판을 닫는
혁신적인 미싱이었다.
앞쪽의 문을 열면 발판이 있고 사용 안 할 때는 문을 닫으면 긴 직사각형으로 장식품을 얹어도 무방한 고상하고 멋스러운
브라더 미싱이 우리 안방을 빛내주고 있는 게 어찌나 자랑스럽던지
한동안 요한 씨는 마누라덕에
부자 되었다고 아이들한테
20 원 씩이나 하는
비싼 빙고 아이스케키도
곧잘 사 주곤 했었다.


이렇게 3번의 퀴즈로
트랜지스터 와 전축
70년대 당시 소 한마리
값에 해당하는
생활에 꼭 필요한
드레스미싱까지 가지게 된 나는
시가댁의 5형제 사이에
특별한 맏며느리로
인정받게 된 것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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