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0.
1969년 12월.
금호동 골짜기 단칸방 생활도..
갖 개업한 보잘것없이
초라한 한의원도 ...
며칠에 한 번씩
찾아주는 환자들이 있어
쌀 떨어질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게 큰 다행이었다.
옆방에 사는 승희네와도
한 부엌을 쓰면서 조금씩 가까워졌다.
키기 크고 삐쩍 말라
억세보이는 승희엄마는
퉁명스러운 말씨와는 달리
배려심이 남달랐고
음식 만들기에 서투른 내게
맛있는 전라도식 생선조림
조리법도 알기 쉽게
가르쳐주는 좋은
이웃이었고
출퇴근 때는 언제나
즐겁게 휘파람을 부는
씩씩하게 생긴 승희 아빠는 스포츠칼라 머리에
잠바 하나만 걸쳐도
멋이 철철 흐르는
친절한 옆 방 아저씨였다.
친절하고 배려심도 많은
승희 아빠는 애처가에다
승희 승재 두 남매에겐
누구보다 자상한 아빠였다.
사흘쯤 택시를 하고
하루 쉬는 날이면 기족이 덕수궁이다 경복궁이다
구경하러 다니고
30대 초반 젊은 청춘들이라
마흔이 가까운 요한 씨와는
삶의 모습이 딴판이었다.
나는 남편과 열네 살이란 차이 때문에 언제나
남편이 두렵고 무서워서
생활비도 그때그때
타서 쓰는데
승희엄마가 보기에
두 형제를 데리고
기도 못 펴고 살며 아이들 아이스케키 하나도 남편허락 없이는 못 사주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한 달 생활비를 달라고
해서 쓰라고 했지만
우린 그런 형편이 아니었기에
늘 택시운전 하면서도
휴일이면 가족 나들이 하는 승희네가 한없는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내가 승희네를
부러워할 때마다
남편은 저렇게 철딱서니 없이
버는 족족 쓰다 보면 평생 택시운전수를 벗어나지
못한다며 승희네 이야기를 듣기 싫어했다.
69년 12월
어느덧 세계의 명절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승희네는 극장구경을 가기로 했다며 택시로 오며 가며
극장에 붙은 간판을 보고
좋은 영화가 오면
친구 부부와 같이
극장 구경도 잘 다니고
있었는데
이번 크리스마스날 에는 영화를 보러 갈 거라는 말에
나도 따라가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같이 가잔다.
나는 오랜만에 용기를 내어 남편에게 정말 좋은 영화가 상영된다니 우리도 극장구경
한번 가자고 졸랐더니 펄쩍 뛰면서 철이 있느냐고
지금 같이 어려운 처지에
무슨 놈의 극장 타령이냐고
소리를 벽력같이 질러대는 거다.
너무 무안하고 속이 상해 이불을 덮어쓰고 한나절 울었지 싶다.
미닫이문 넘어 한의원을 지키고 있던 남편이 이불을 덮어쓴째 꼼짝도 안 하는 나를 보더니 혀를 끌끌 차면서
저렇게 철없기는..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데
그렇게 극장구경 가고 싶냐고
나는 안 갈 테니 당신이나 애들 데리고 승희네 따라 구경 갔다 오라며 시퍼런 백 원짜리
두장을 던져주었다.
극장 구경 허락이 떨어지자
부지런히 저녁밥을 지어먹고
포대기에 둘째를 둘러업고 큰애 손을 잡고 눈 쌓인 길을 성큼성큼 걷는 승희네를 따라가느라고
한겨울 추위에도
등줄기에 땀이 흘렀다.
그 당시 영화배우 신영균 씨가 주인이던 금호극장 은 왜 그리 먼지.. 금남시장을 벗어나 보지 못한 내게 금호극장이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몰랐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따라가는 금호극장은
십리도 더 되는 것 같았다.
종종걸음으로 아들을 잡아끌다시피 해서
드.디.어.
마.침.내.
대낮같이 밝은
극장간판이 보이고
승희네를 따라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극장안으로 들어섰다.
이미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듯
극장 안은 울려대는
엄청난 음향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쭈뼛거리며
승희네 뒤를 따르는 내게
영화가 이미 상영되고 있으니
어서 들어가자고 하는
승희네를 따라
영화관 문을 열고
검은 휘장을 헤치자
상영되고 있던 예고편..
삼사 년 만에 극장 구경을 하게 된 나는 벽면 하나를 가득 메운 화면 크기에도 놀랐지만 음향 또한 예전과는 달리 고막을 찢고
가슴이 쿵쿵 울리는 전혀 새로운 음향이었고 화면에는
이소룡 영화였나
온 몸에 피 칠갑을 한 체
허공 중을 날아다니며 칼을 휘두르는 무사들의 무시무시한 모습과 벼락 치는듯한 굉음에
나는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이었지만
손잡고 따라 들어온 4살짜리 아들이 화면을 보자마자
기절초풍하듯 놀라
비명을 질러대며 땅바닥에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엄마 무서워 집에 가자며
악을 악을 써대며
발버둥 치며 울어대니
할 수 없이 데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극장 안에 머문 시간은
5분도 채 안 되는 시간
모처럼 온 극장
애기 때문에 구경을 못하게 생겼으니 환불해
달라고 하니까
이미 입장했기에
환불이 안된다고 하니
아까운 돈 200 원만 날리고 겨울바람 쌩쌩부는 먼 길을
눈길에 미끄러지며 집에 돌아갔더니 남편이
깜짝 놀라며
왜 벌써 왔냐고..
큰애가 휘장을 열자
무술영화 예고편에 놀라 까무러치게 울어서
구경도 못하고 돈만 버리고 왔다니까
그러게 내가 뭐라고 했냐고
남편말 안 듣더니 꼴좋다고..
그때 스물다섯 살
철없던 엄마였던 나는
큰애를 펑펑 두드려 패주고
싶은 걸 이를 악물고 참았고
그 후 20년이 지나도록
극장문을 다시 밟은 적이
내 기억에는 없다.
그 후 승희네는 윗동네
지금의 전철역 부근
방 2개짜리로 이사를 갔는데
70년 봄 5살짜리 승희가
두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채 헐떡거리며 달려와 문을 두드렸다.
나를 보자말자 엉엉 소리내어 흐느끼는 승희에게
무슨 일이냐고 달래며
물었더니
아줌마 우리 엄마가 빨리
아줌마 델고 오래요..
우리엄마 죽으려고 해요..
하는 이유도 모르는 말을 하며
빨리 우리집 같이 가자고
발을 동동 구르기에
영문도 모르고 이사 간 집을 승희를 따라갔더니
승희할머니가 달려 나와
지금 사람 죽게 생겼다며 도와달라고 했다.
안방문을 열어보니
만삭의 승희엄마가
분만 중이었는데
몇 시간째 진통만 하고 애기가
발 만 보이고 안 나온다고
이일을 어찌하냐고 사색이 되셨다.
승희 엄마는 나 죽는다고
나를 보고 살려달라고 하니
갑자기 산부인과도
어디있는지 생각도 안나고
우선 급한대로
우리 남편이 무의면에
공의로 근무하면서
애기도 많이 받아봤으니
빨리 가서 데리고 오겠다며
줄달음쳐 남편에게
승희엄마 난산으로 죽게 생겼다며
빨리빨리 가서 도와주자고..
남편이 왕진가방을 챙겨
달려가서 도와주었기로
무사히 아기를 낳을 수 있었다.
이틑날 사과 한바구니를 들고 우리집을 찾아온
승희 아버지는
고맙다고 고맙다고
원장님 아니었으면
안식구도 아기도 모두
잘못 되었을거라며
이 은혜 두고두고 갚겠다며
절을 열번도 더 하고갔다.
승희네는 예쁜 예쁜 공주님을
얻게 되니 1남 2녀의 다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다가
용산인지 이태원 인지로
이사를 간다며 인사를 왔는데 아사를 가면서 서로
소식이 끊어졌다.
엄마 아빠와는 달리
하얀 얼굴에 볼이 통통하던 단발머리 소녀 승희의 예쁘고
귀엽던 모습이
때때로 떠 오른다.
큰 아들과 동갑 나이였기에
그 승희도 올해 벌써 59살이 되었겠네.
1년간 비좁은 부엌을 같이
쓰면서 정답게 살았던
승희엄마..
가을이면 시골에서 농사지은
쌀과 온갖 잡곡들을
좁은 방안 쌀통에 가득가득
쟁여놓고 살아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
지금도 간간히 생각나는
승희네 엄마 아빠는 지금은
어디서 살고 있을까?
오늘도 하릴없이
하루를 보내며
이 생각 저 생각..
옛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샴버그의 목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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