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9 연중 19주일. 물위를 걸으심
찬미 예수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작년 일년을 제주에서 안식년을 보냈습니다. 제주의 깊고 푸른 밤은 저를 주님의 은총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그 깊은 밤에 오늘 복음에 대해 묵상글을 쓴바가 있었는데 오늘 강론은 그때의 그 묵상문을 원문 그대로 읽어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보통때의 강론보다 두배가량 되는 긴 내용이지만 그냥 소설한편 듣는다는 편한마음으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1.오천명을 먹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베타니아로 먼저 가게 하셨다. 그동안에 군중들을 돌려 보내신 후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2.사람들은 빵을 배불리 먹은 뒤 “ 이분이야 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며 예수님께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산으로 피해 가셨다.
3.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실로 대단한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생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천상의 빵을 배불리 먹었다. 모두 몸과 마음이 흡족하였다.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또한 충만하였다. 이 대목에서 몇몇 사람들이 군중심리를 조장한다. 이분은 바로 그 예언자, 구세주이시다.라고 하면서 바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분이라고 쑤꾼거리기 시작한다.군중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어 목마를 태우고,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려고 한다.
4.사람들중에는 항상 정치적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약삭빠른 계산을 한다. 바로 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왕으로 내세워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립하고, 그 과정에서 개국공신이 되려는 계산까지 이미 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현실세계에서 자기 잇속에 맞춰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을 왕으로 모시면 로마를 내쫓을 수 있고, 적어도 빵에 대한 걱정은 없을 것이고, 자기들은 새로 만들어진 하느님나라에서 적어도 한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5.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낌새와 속셈을 이미 간파하고 계셨다. 세속적인 계산이 머릿속에서 굴러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사라지신다.
6.피곤하셨던 예수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기를 원하셨지만 많은 사람이 영적으로 배고파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 같은 그들에게 측은지심이 드시어 자상하게 가르쳐주시고, 저녁때가 되자 오천명을 먹이시는 대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님을 두고 세속적인 계산이 오고가자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시어 산으로 가신다. 제자들은 이미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 베타니아로 가고 있었다.
7.산으로 가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야말로 온전한 성령과 함께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시는 기도이셨을 것이다. 완전한 기도의 모습, 어떤 기도가 완전한 기도일는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기도, 자연과 우주를 초월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감히 상상을 해본다.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안에서 온전히 일치하는 기도의 모습으로 감히 상상을 해본다.
8.그런데 날씨가 나빠졌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쁨과 희열속에 일치의 기도를 하고 계셨을 것이다. 시간이 이미 많이 흘렀지만 시공을 초월한 예수님은 또한 자연을 초월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온몸에 힘이 완전 빠진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날 듯이 자유스러우셨으리라.
9.예수님께는 날씨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심각한 상태였다. 저녁무렵에 배를 띄웠는데 새벽이 되도록 아직도 바람과 폭풍우와 싸우고 있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가 나아가지 않는다.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 갑판위로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물이 들이친다. 번개와 천둥까지 제자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갈릴레아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넗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호수는 호수다. 제자들중에는 이 갈릴레아 호수전문가들이 꽤 있었다.그들은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었다. 바람이 언제 부는지, 어떤 방향으로 불어대는지, 파도가 어떻게 치는지, 어떤 방향으로 치는지 그들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밤의 이 바다는 웬지 심상치 않다. 이런 적은 별로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런 폭풍우는 아무리 기억을 떠 올려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오늘밤은 이 갈릴레아 바다가 아마도 미친 것 같을 정도이다. 몰아치는 비바람, 폭풍우,파도에 눈을 뜰수도 없다. 게다가 무섭게 울어대는 천둥과 천지를 하앟게 비추는 번개는 제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배와 상관없이 살아온 제자들은 이미 그로기 상태이다. 아니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제자들이 이젠 지칠대로 지쳤다. 더 이상 남아있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마음속에 공포와 전율이 몰아친다. 서로 말은 안하지만 두려움의 극심한 파도가 마음과 마음에서 읽혀진다. 벌써 새벽 네시이다. 저녁 무렵 7시경에 배를 띄웠다면 벌써 9시간째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가 다 죽게 되었는데 그분은 그 언젠가 뱃머리에서 주무시듯이 산의 어느 동굴에서 조용히 주무시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별의 별 잡스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산위에서 고생하는 제자들을 보신다. 애처로운 마음,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걸음을 재촉하여 호수위를 걸어 나가신다.
10.제자들의 절망이 극도에 달했을 때 깜깜한 폭풍우 가운데서 뭔가가 희끈희끈하게 보였다, 안보였다를 반복을 한다. 그 희끈희끈한 물체는 배로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제자들은 순간 겁에 질렸다. 엉겹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러댓다.
11.예수님께서 물위를 걷고 계셨다. 그분의 몸짓은 깃털과 같이 너무 가벼웠다. 시간과 공간과 중력을 초월한 모습이셨다. 그 모습은 자유 바로 자유 그 자체였다.
언젠가 인터스텔라 라는 영화를 보았다. 내용이 감동적이라 강론에 써먹기 위해 두 번이나 그 영화를 봤다.
주인공이 우주를 탐험하다가 인간의 차원과는 다른 4차원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인간의 세상과는 통할 수 없는 차원의 세상이었다. 잘못하면 영원히 그 세상에 갇혀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주인공은 딸과의 통교를 시도한다. 통교의 방법은 바로 기억과 사랑이었다.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딸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사랑으로 아버지가 보내는 신호를 포착하게 된다. 그야말로 극적으로 그 인간의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버지는 빠져나오게 된다.
다른 차원에서 서로 통교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기억과 사랑임을 그 영화는 가르쳐주고 있었다. 즉 사랑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서 다른 차원과도 연결되고, 통교된다는 것이다.
12.예수님도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바로 기억과 사랑으로 우리와 통교하신다. 그 신호는 기억과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만 포착이 가능한 신호이다. 다른 차원의 예수님께서 기억과 사랑으로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
13.“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예수님의 모습은 진짜다. 가짜가 아니다. 유령이 아니다. 꾸민 모습도, 위장, 분장, 치장된 모습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바로 그 예수님이신 것이다. 기억과 사랑으로 통교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과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안심시키신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사방에 여전히 바람은 드세게 분다. 몸이 날아갈 듯한 그 바람속에서도 예수님은 끄떡없이 중심을 잡고 계신다. 배는 요동을 치는데 예수님은 전혀 흔들림이 없으시다.
14.마태오복음에서만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 오라고 하십시오”라고 소리친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신다.
베드로의 성격이 너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열정적이고,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곧 흥분을 하고 만다.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나타난 예수님은 그 자체가 구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다. 그저 마음에서 시키는대로 할뿐인 사람이다. 그저 생각한대로, 마음이 시키는대로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15.아마 그상황에서 베드로의 상태를 본 예수님은 웃으셨을것만 같다. 이미 베드로의 성격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그렇다면 “오너라”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 단순하시다. 단순한 성격의 베드로를 아마 예수님은 좋아하셨을 것 같다. 예수님 자신이 너무나 단순한 분, 자유인이셨기 때문이다. 의식에 지배를 받지 않는, 그래서 이것 저것 따지지 않는 단순함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은 서로 통했을 것 같다.
16.우리는 너무 따지고 따진다.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
불리할까.. 유리할까..도움이 될까. 방해가 될까.. 이것 저것 따지는 것이 너무 많다. 의식의 세계가 너무 크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너무 편협하다. 선입견도 많고, 편견도 많다. 또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자기 중심적이고, 너무 폭발적이다.
인간은 지적인 능력으로, 또 감정적인 능력으로 판단하고, 따지고, 대처를 한다. 또 때로는 의지적인 노력으로 대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조정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욕심, 탐욕인 경우가 허다하다.
베드로는 그런 의식, 감정, 의지보다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 마음속에는 하느님께 향한 지향과 방향이 있었다. 그 지향과 방향에 맞으면 베드로는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고 무식하다고, 과감하다고, 어처구니 없다구, 엉뚱하다고, 비현실적이라고 놀리고, 속으로는 싫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7.베드로는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든다. 그 행동은 베드로의 호기보다는 주님께 대한 반가운 마음이 앞선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마 서너걸음 걸었을까! 그의 눈에는 갑자기 더욱 거세게 부는 바람이 들어온다. 몸이 순간적으로 날라갈것만 같았다. 순간 베드로의 마음속에 무서움이 몰려든다. 그 무서움은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베드로의 몸에 온갖 힘이 들어가더니 물에 빠져들게 된다. 코와 입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파도는 쉴새없이 그의 몸을 덥친다. 조류는 거세게 그를 뒤흔든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그는 점점 더 물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배위의 제자들도 긴장된 모습으로 이 상황을 지켜본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베드로는 비명을 지른다. 머리까지 거의 다 빠진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신다.
지난 봄에 미국의 필라델피아를 갔는데 마침 이 대목에 대한 성극공연이 있었다. 이 자연을, 이 상황을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다른 장면들은 별로였는데 포스터에 빠지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는 예수님의 강력한 손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18.베드로의 몸을 끌어 올리면서 예수님께서는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손이 그 폭풍우속에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강한 힘이 그손에는 있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안도감이 몰려왔다. 일시에 모든 불안과 두려움, 공포가 사라진다. 이제 살았구나! 이분과 함께 하면 어떤 죽음의 공포 상황에서도 이렇게 편하고, 따뜻하고, 가벼울수가 있구나! 하고 베드로는 느낀다. 그 따뜻한 손,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손을 베드로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순간에 몸이 쑥 물밖으로 끌어 올려지면서 마치 죽음에서 생명으로, 공포에서 신뢰로, 절망에서 희망으로,의심에서 신앙으로 솟아 오르는 자신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꾸중은 꾸중으로 들리지 않았다. 베드로를 잔잔하게 쳐다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이 너무 따스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한계와 약점을 다 보시면서도 깊이 이해하시고, 배려하시는 그분의 따스함은 그 절대절명의 죽음의 밤을 이기기에 충분했다.
19.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하였다.
20.온갖 풍랑과 비바람에 시달리는 우리의 인생살이다.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자그마한 산을 오르면 그보다 더 높은 산이 언제나 기다린다. 어떤 산이든 숨이 막히는 깔닥고개를 넘어야 한다. 때로는 깊은 계곡을 건너야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깍아지른 벼랑위를 지나가야 하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때는 희망으로 가득차기도 하지만 또 어떤때는 절망으로 가득차기도 한다. 수많은 인내와 침묵, 절제가 필요하기도 하다. 너무 힘들어 적당히 살려고 하면 우리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또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면 부딪혀야 하는 현실의 적들이 너무나 많다. 너무 조용히 살려하면 사람들의 무시와 편견을 견뎌야 하고, 너무 열심히 살려하면 사람들의 질시와 질투를 견뎌내야 한다.
21.온갖 악의 세력들을 우리를 노려보며 우리가 얼음판에 빠지기를 유도하고, 산의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길 유도한다.
22.주님이 안계신다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 이 모든 힘든 인생의 역경을 혼자서 견뎌내야 한다. 한계를 가진 인간인지라 그 본래의 아름다움이 변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 인생에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온갖 삶의 역경, 비바람, 폭풍우, 우리를 집어 삼킬 듯이 으르렁대는 온갖 죽음의 세력들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이다.
23.그분이 우리 삶의 배에 오르셔야만 우리 삶의 풍랑을 비로소 멈출 수 있다. 누구든지 삶의 그라운드 제로 체험을 하게 마련이다. 이리보아도, 저리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듯한 절망, 시련, 배신, 좌절의 순간을, 그 폭풍우의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죽음과 삶이 왔다가는 하는 순간들을 막다뜨리게 마련이다. 그 순간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그 순간이 있기에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4.그분은 정말 묘하시게도 우리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 죽음과 삶이 오가는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우리에게 구세주로 다가오신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교만하기에 그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면 진정으로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25.그분이 우리 삶의 배에 오르시고, 바람이 그치고, 평화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무 쉽게 그 강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기억과 그 사랑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 깊이, 우리 존재 그 깊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손길, 구세주의 손길은 우리 영혼에 깊이 각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손길을 받은 사람은 그 손길이 이끄는대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26.긴 강론 열심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멘
찬미 예수님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저는 작년 일년을 제주에서 안식년을 보냈습니다. 제주의 깊고 푸른 밤은 저를 주님의 은총으로 안내해주었습니다. 그 깊은 밤에 오늘 복음에 대해 묵상글을 쓴바가 있었는데 오늘 강론은 그때의 그 묵상문을 원문 그대로 읽어 드리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보통때의 강론보다 두배가량 되는 긴 내용이지만 그냥 소설한편 듣는다는 편한마음으로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1.오천명을 먹이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베타니아로 먼저 가게 하셨다. 그동안에 군중들을 돌려 보내신 후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러 산으로 올라가셨다.
2.사람들은 빵을 배불리 먹은 뒤 “ 이분이야 말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예언자이시다” 하며 예수님께 달려들어 억지로라도 왕으로 모시려는 낌새를 알아채시고 혼자서 산으로 피해 가셨다.
3.오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실로 대단한 기적이었다. 사람들은 생전 먹어보지 못한 맛있는 천상의 빵을 배불리 먹었다. 모두 몸과 마음이 흡족하였다. 예수님께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또한 충만하였다. 이 대목에서 몇몇 사람들이 군중심리를 조장한다. 이분은 바로 그 예언자, 구세주이시다.라고 하면서 바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오신분이라고 쑤꾼거리기 시작한다.군중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사람들이 예수님께 몰려들어 목마를 태우고, 예수님을 왕으로 선포하려고 한다.
4.사람들중에는 항상 정치적인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약삭빠른 계산을 한다. 바로 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왕으로 내세워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립하고, 그 과정에서 개국공신이 되려는 계산까지 이미 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현실세계에서 자기 잇속에 맞춰 머리를 굴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을 왕으로 모시면 로마를 내쫓을 수 있고, 적어도 빵에 대한 걱정은 없을 것이고, 자기들은 새로 만들어진 하느님나라에서 적어도 한자리는 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속셈이었을 것이다.
5.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의 낌새와 속셈을 이미 간파하고 계셨다. 세속적인 계산이 머릿속에서 굴러가고 있을 때 예수님은 사라지신다.
6.피곤하셨던 예수님, 한적한 곳으로 가서 쉬기를 원하셨지만 많은 사람이 영적으로 배고파하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목자없는 양과 같은 그들에게 측은지심이 드시어 자상하게 가르쳐주시고, 저녁때가 되자 오천명을 먹이시는 대기적을 행하신다. 예수님을 두고 세속적인 계산이 오고가자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시어 산으로 가신다. 제자들은 이미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 베타니아로 가고 있었다.
7.산으로 가신 예수님은 아버지 하느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신다. 예수님의 기도는 그야말로 온전한 성령과 함께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하시는 기도이셨을 것이다. 완전한 기도의 모습, 어떤 기도가 완전한 기도일는지```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아마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기도, 자연과 우주를 초월한 기도가 아니었을까! 감히 상상을 해본다.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안에서 온전히 일치하는 기도의 모습으로 감히 상상을 해본다.
8.그런데 날씨가 나빠졌다. 아마 예수님께서는 아랑곳하지 않고, 기쁨과 희열속에 일치의 기도를 하고 계셨을 것이다. 시간이 이미 많이 흘렀지만 시공을 초월한 예수님은 또한 자연을 초월하고 계시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온몸에 힘이 완전 빠진 상태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날 듯이 자유스러우셨으리라.
9.예수님께는 날씨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제자들은 심각한 상태였다. 저녁무렵에 배를 띄웠는데 새벽이 되도록 아직도 바람과 폭풍우와 싸우고 있었다. 아무리 노를 저어도 배가 나아가지 않는다. 사납게 몰아치는 파도, 갑판위로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물이 들이친다. 번개와 천둥까지 제자들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 갈릴레아 바다는 바다가 아니다. 넗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호수는 호수다. 제자들중에는 이 갈릴레아 호수전문가들이 꽤 있었다.그들은 이 호수에서 잔뼈가 굵었다. 바람이 언제 부는지, 어떤 방향으로 불어대는지, 파도가 어떻게 치는지, 어떤 방향으로 치는지 그들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밤의 이 바다는 웬지 심상치 않다. 이런 적은 별로 경험해보지 못했다. 이런 폭풍우는 아무리 기억을 떠 올려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이다. 오늘밤은 이 갈릴레아 바다가 아마도 미친 것 같을 정도이다. 몰아치는 비바람, 폭풍우,파도에 눈을 뜰수도 없다. 게다가 무섭게 울어대는 천둥과 천지를 하앟게 비추는 번개는 제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다. 배와 상관없이 살아온 제자들은 이미 그로기 상태이다. 아니 그 배에 타고 있던 모든 제자들이 이젠 지칠대로 지쳤다. 더 이상 남아있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마음속에 공포와 전율이 몰아친다. 서로 말은 안하지만 두려움의 극심한 파도가 마음과 마음에서 읽혀진다. 벌써 새벽 네시이다. 저녁 무렵 7시경에 배를 띄웠다면 벌써 9시간째 사투를 벌이는 중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계시는가! 우리가 다 죽게 되었는데 그분은 그 언젠가 뱃머리에서 주무시듯이 산의 어느 동굴에서 조용히 주무시고 계시는 것은 아닐까? 별의 별 잡스런 생각들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그 순간 예수님께서는 산위에서 고생하는 제자들을 보신다. 애처로운 마음, 측은지심이 발동하여 걸음을 재촉하여 호수위를 걸어 나가신다.
10.제자들의 절망이 극도에 달했을 때 깜깜한 폭풍우 가운데서 뭔가가 희끈희끈하게 보였다, 안보였다를 반복을 한다. 그 희끈희끈한 물체는 배로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제자들은 순간 겁에 질렸다. 엉겹결에 유령이다! 하며 소리를 질러댓다.
11.예수님께서 물위를 걷고 계셨다. 그분의 몸짓은 깃털과 같이 너무 가벼웠다. 시간과 공간과 중력을 초월한 모습이셨다. 그 모습은 자유 바로 자유 그 자체였다.
언젠가 인터스텔라 라는 영화를 보았다. 내용이 감동적이라 강론에 써먹기 위해 두 번이나 그 영화를 봤다.
주인공이 우주를 탐험하다가 인간의 차원과는 다른 4차원의 세계에 갇히게 된다. 인간의 세상과는 통할 수 없는 차원의 세상이었다. 잘못하면 영원히 그 세상에 갇혀 나오지 못할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주인공은 딸과의 통교를 시도한다. 통교의 방법은 바로 기억과 사랑이었다.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딸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사랑으로 아버지가 보내는 신호를 포착하게 된다. 그야말로 극적으로 그 인간의 차원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버지는 빠져나오게 된다.
다른 차원에서 서로 통교할 수 있는 방법은 바로 기억과 사랑임을 그 영화는 가르쳐주고 있었다. 즉 사랑은 인간의 차원을 넘어서서 다른 차원과도 연결되고, 통교된다는 것이다.
12.예수님도 우리와는 다른 차원의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바로 기억과 사랑으로 우리와 통교하신다. 그 신호는 기억과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있어야만 포착이 가능한 신호이다. 다른 차원의 예수님께서 기억과 사랑으로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
13.“나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예수님의 모습은 진짜다. 가짜가 아니다. 유령이 아니다. 꾸민 모습도, 위장, 분장, 치장된 모습도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바로 그 예수님이신 것이다. 기억과 사랑으로 통교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사랑과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제자들을 안심시키신다. “안심하여라, 겁낼 것 없다” 사방에 여전히 바람은 드세게 분다. 몸이 날아갈 듯한 그 바람속에서도 예수님은 끄떡없이 중심을 잡고 계신다. 배는 요동을 치는데 예수님은 전혀 흔들림이 없으시다.
14.마태오복음에서만 베드로의 이야기가 나온다.
“주님이십니까? 그러면 저더러 물위로 걸어 오라고 하십시오”라고 소리친다. 예수님께서 “오너라” 하신다.
베드로의 성격이 너무 잘 드러나는 장면이다. 열정적이고,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그 급박한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자 곧 흥분을 하고 만다.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고,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나타난 예수님은 그 자체가 구원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이것저것 따지지 않는다. 그저 마음에서 시키는대로 할뿐인 사람이다. 그저 생각한대로, 마음이 시키는대로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다.
15.아마 그상황에서 베드로의 상태를 본 예수님은 웃으셨을것만 같다. 이미 베드로의 성격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그렇다면 “오너라” 예수님의 대답은 아주 간단명료, 단순하시다. 단순한 성격의 베드로를 아마 예수님은 좋아하셨을 것 같다. 예수님 자신이 너무나 단순한 분, 자유인이셨기 때문이다. 의식에 지배를 받지 않는, 그래서 이것 저것 따지지 않는 단순함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은 서로 통했을 것 같다.
16.우리는 너무 따지고 따진다. 손해가 될까,. 이익이 될까..
불리할까.. 유리할까..도움이 될까. 방해가 될까.. 이것 저것 따지는 것이 너무 많다. 의식의 세계가 너무 크다. 그러나 인간의 의식이라는 것은 너무 편협하다. 선입견도 많고, 편견도 많다. 또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 자기 중심적이고, 너무 폭발적이다.
인간은 지적인 능력으로, 또 감정적인 능력으로 판단하고, 따지고, 대처를 한다. 또 때로는 의지적인 노력으로 대처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조정하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욕심, 탐욕인 경우가 허다하다.
베드로는 그런 의식, 감정, 의지보다는 마음이 우선이었다. 그 마음속에는 하느님께 향한 지향과 방향이 있었다. 그 지향과 방향에 맞으면 베드로는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그대로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보고 무식하다고, 과감하다고, 어처구니 없다구, 엉뚱하다고, 비현실적이라고 놀리고, 속으로는 싫어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17.베드로는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아무 생각없이 그냥 물속으로 뛰어 든다. 그 행동은 베드로의 호기보다는 주님께 대한 반가운 마음이 앞선 행동이었을 것이다. 아마 서너걸음 걸었을까! 그의 눈에는 갑자기 더욱 거세게 부는 바람이 들어온다. 몸이 순간적으로 날라갈것만 같았다. 순간 베드로의 마음속에 무서움이 몰려든다. 그 무서움은 곧 두려움으로 바뀐다. 베드로의 몸에 온갖 힘이 들어가더니 물에 빠져들게 된다. 코와 입에 물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파도는 쉴새없이 그의 몸을 덥친다. 조류는 거세게 그를 뒤흔든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그는 점점 더 물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한다. 배위의 제자들도 긴장된 모습으로 이 상황을 지켜본다. “주님 살려주십시오” 베드로는 비명을 지른다. 머리까지 거의 다 빠진 상황에서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신다.
지난 봄에 미국의 필라델피아를 갔는데 마침 이 대목에 대한 성극공연이 있었다. 이 자연을, 이 상황을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다른 장면들은 별로였는데 포스터에 빠지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주시는 예수님의 강력한 손이 매우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18.베드로의 몸을 끌어 올리면서 예수님께서는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손이 그 폭풍우속에서도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강한 힘이 그손에는 있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안도감이 몰려왔다. 일시에 모든 불안과 두려움, 공포가 사라진다. 이제 살았구나! 이분과 함께 하면 어떤 죽음의 공포 상황에서도 이렇게 편하고, 따뜻하고, 가벼울수가 있구나! 하고 베드로는 느낀다. 그 따뜻한 손, 부드러우면서도 강력한 손을 베드로는 평생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순간에 몸이 쑥 물밖으로 끌어 올려지면서 마치 죽음에서 생명으로, 공포에서 신뢰로, 절망에서 희망으로,의심에서 신앙으로 솟아 오르는 자신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님의 꾸중은 꾸중으로 들리지 않았다. 베드로를 잔잔하게 쳐다보시는 예수님의 눈길이 너무 따스했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한계와 약점을 다 보시면서도 깊이 이해하시고, 배려하시는 그분의 따스함은 그 절대절명의 죽음의 밤을 이기기에 충분했다.
19.그리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사람들은 그 앞에 엎드려 절하며 주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하였다.
20.온갖 풍랑과 비바람에 시달리는 우리의 인생살이다.
잠시도 쉴 틈이 없다. 자그마한 산을 오르면 그보다 더 높은 산이 언제나 기다린다. 어떤 산이든 숨이 막히는 깔닥고개를 넘어야 한다. 때로는 깊은 계곡을 건너야 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깍아지른 벼랑위를 지나가야 하기도 한다. 우리의 마음은 어떤때는 희망으로 가득차기도 하지만 또 어떤때는 절망으로 가득차기도 한다. 수많은 인내와 침묵, 절제가 필요하기도 하다. 너무 힘들어 적당히 살려고 하면 우리 내면의 목소리가 우리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또 너무 열심히 살려고 하면 부딪혀야 하는 현실의 적들이 너무나 많다. 너무 조용히 살려하면 사람들의 무시와 편견을 견뎌야 하고, 너무 열심히 살려하면 사람들의 질시와 질투를 견뎌내야 한다.
21.온갖 악의 세력들을 우리를 노려보며 우리가 얼음판에 빠지기를 유도하고, 산의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길 유도한다.
22.주님이 안계신다면, 주님을 믿지 못한다면 이 모든 힘든 인생의 역경을 혼자서 견뎌내야 한다. 한계를 가진 인간인지라 그 본래의 아름다움이 변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 인생에 함께 계신다면 우리는 온갖 삶의 역경, 비바람, 폭풍우, 우리를 집어 삼킬 듯이 으르렁대는 온갖 죽음의 세력들을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이다.
23.그분이 우리 삶의 배에 오르셔야만 우리 삶의 풍랑을 비로소 멈출 수 있다. 누구든지 삶의 그라운드 제로 체험을 하게 마련이다. 이리보아도, 저리보아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는 듯한 절망, 시련, 배신, 좌절의 순간을, 그 폭풍우의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죽음과 삶이 왔다가는 하는 순간들을 막다뜨리게 마련이다. 그 순간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니 그 순간이 있기에 주님이 우리의 구세주,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4.그분은 정말 묘하시게도 우리 삶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 죽음과 삶이 오가는 그 절대절명의 순간에 우리에게 구세주로 다가오신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교만하기에 그 순간을 체험하지 못하면 진정으로 그분이 구세주이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25.그분이 우리 삶의 배에 오르시고, 바람이 그치고, 평화가 찾아온다 하더라도 우리는 너무 쉽게 그 강한 체험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그 기억과 그 사랑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 깊이, 우리 존재 그 깊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손길, 구세주의 손길은 우리 영혼에 깊이 각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손길을 받은 사람은 그 손길이 이끄는대로 살아 갈 수 있는 것이다.
26.긴 강론 열심히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그러자 배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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