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다반사

걸어서 살곳이 다리까지 go go ssing ssing

저녁 7시 해가 넘어가기 직전

요한씨에게 저녁 밥상을 차려주고는

 손녀들을 데리고 한강으로 go go~

 

그동안 말로만 듣던  유서깊은 살곳이 다리

수변길을 따라서 걷다보니

이정표에 살곳이 다리가 표기되어 있어

얼마나 반가웠는지 ...

 

언젠가 꼭 한번 가 보고싶던 곳이라

두 아이들에겐 조금 멀다 싶었지만

 우리 조상들이 남긴 귀중한 문화유산인  살곳이 다리를

이번 기회에 꼭 한번 보여주고싶은 생각이 들었다.

 

옥수역을 기점으로 살곳이다리까지 3km

왕복 6km면 십오리를 걷는것인데

시원한 강바람을 맞으며 걷다보니

의외로 힘들지 않게 다녀올수가 있었다.

 

 금호나들목을 나서면 바로 만나게 되는

어린이 놀이터와 각가지 운동기구들이

유리에게는 지상천국 ...

마치 디즈니랜드를  만난듯 

기구마다 신나게 돌아다니느라 

좋아서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져 정신을 못차릴 지경이다. 

 영차~ 영차~

열심히 페달을 밟는 이유는 살을 빼기 위함이래나...^^

 

 카메라를 들이대자 v싸인 보내주는 쌘스~

 3한강교 반대인 한양대 쪽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오솔길양쪽으로 숲이 아름답게 조성되어있고

강바람이 어찌나 시원한지

가족단위로 저녁 산책을 나온사람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줄 을 이어 달리는 모습을보면

외국의 어느 도시인들 이 보다 더 아름다우랴 싶은 생각이 든다.

 산책을 나갈때도 ...

유리는 꼭 자기 마음에 드는 옷을 갈아입고

머리도 이리해라 저리해라 잔소리가 많은데다

입술에는 맆글로스까지 바르고 나간다는...

 

오밤중에..누구한테 이쁘게 보이려고

7살짜리가 치장에 어찌나 신경을 쓰는지

 

할머니 퍼퓸하고가면 안돼? 하고 묻기까지한다.

 

아이구 요 쪼끄만 아가씨야

한강 나갈때 퍼퓸하면 벌들이 달려들어 안된다 안돼

하고 꽥 소리 질러야 말을 듣는다.

 응봉교다리를 지나 멀리보이는 다리가 성동교이고

성동교 넘어 700미터 거리에 살곳이다리가 있다.

 옥수역에서 이곳까지 2Km를

 콧노래 불러가며 걸어오는데 너무 재미있었다.

우리집에서 살곳이다리까지 왕복 6km라니 ...

손녀들과 이야기하며 걸어보니 그리 멀게 느껴지지가 않고

힘들지 않아 좋았다.

 물 만난 유리...저 함박 웃음하구는...

운동기구만 보면 달려가서 한바탕 뛰어야 직성이 풀리는 모양이다

 성수대교를 이어주는 응봉교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포커스가 맞지 않았지만...

길고양이가 지원이를 보고 쓰다듬어 달라고

어찌다 감겨들던지...

 드.디.어...

살곳이 다리에 도착했다.

600년전...세종임금때에 축조하기 시작했다는 살곳이 다리는

소 달구지 2대가 서로 교행할수 있으리만큼 의 넓이로 보였는데

이 넓고 큰 돌을 어떻게 이리 반듯하게 다듬었으며

이렇게 빈틈없이 짜맞춘것처럼 다리를 놓았는지

우리 조상님들의 건축기술에 다시한번 탄복했다.

 

 

 

 

 

 

대한민국 대한민국보물 Jeongotgyo.jpg 지정번호 보물 제1738호
(2011년 12월 23일 지정)
소재지 서울특별시 성동구
행당동 58
제작시기 조선시대 소유자 국유 수량 10,232㎡ 비고 유적건조물 / 교통통신 / 교통 / 교량
서울 살곶이 다리
(서울 [箭串橋])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사적
지정번호 사적 제160호
(1967년 12월 15일 지정)
(2011년 12월 23일 해지)

살곶이다리조선의 수도인 한성부와 한반도 남동부를 잇는 주요 교통로에 세워진 다리로 강릉·충주 지방을 연결하는 주요 통로였다. 전곶교(箭串橋)라고도 한다. 현존하는 조선 시대 돌다리 중 가장 길다. 살곶이다리는 1420년(세종 2년)에 다리를 짓기 시작해 1483년(성종 14년)에 완공했다.[1]

명칭에 대해서는 '제반교(濟磐橋)', '전곶교', '전관교(箭串橋)'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살곶이다리'나 '전곶교'가 맞고 한자 이름 ‘箭串橋’는 ‘전관교’가 아니라 ‘전곶교’로 읽는 게 옳다고 한다. 1967년 12월 15일 사적 제160호로 지정 [2]되으나, 2011년 12월 23일 이를 해제하고 대한민국보물 제1738호로 지정하였다. 대다수의 석교 문화재가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사적 지정요건인 인물, 역사, 사건 등을 고려해볼 때 유형문화재로서의 성격이 강하므로 사적을 해제하고 보물로 변경 지정하였다.[3]

개요[편집]

살곶이는 청계천이 중랑천과 만나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역으로,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국가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하였다.

이곳에 다리를 만든 것은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이었다. 세종 즉위 후 태종은 광나루에서 매사냥을 즐기고, 살곶이에 있는 낙천정(樂天亭)과 풍양이궁(豊壤離宮)에 수시로 행차하였다. 따라서 이곳의 하천을 안전하게 건너기 위하여 다리를 놓게 되었다고 한다.

세종 2년(1420) 5월 태종은 영의정 유정현(柳廷顯) ·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비로소 돌다리 세우는 공사를 담당하게 하였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였다. 세종 4년(1422)에 태종이 죽자 이곳을 통한 행차가 거의 없어지고, 또한 세종 3년부터 시작된 도성 안 개천(開川) · 제방축조공사로 인해 도성 밖 이곳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길을 이용하는 백성들로 인하여 살곶이다리를 만들 필요성이 다시 제기되어, 성종 6년(1475) 9월 살곶이다리를 완성시킬 것을 양주목(楊州牧)에 명령하였다.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에 따르면 성종 13년(1482) 한 승려가 방법을 고안하여 다리를 완공하자, 왕이 이를 치하하고 다리가 집과 같이 평평하여 마치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 하여 ‘제반교(濟盤橋)’ 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이렇게 완성된 살곶이다리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장석판교(長石板橋) 중 가장 큰 규모의 다리로서, 가로로 놓인 기둥이 4열, 세로로 16열에 모두 64개의 돌기둥으로 만들어졌다. 다리 높이는 하상(河上)으로부터 10척 내외이며 기둥의 높이는 4척 가량이다. 좌우의 교안(橋岸)을 장대석(長臺石)으로 쌓고 네모난 돌기둥 교각 16개소를 세웠다. 교각의 간격은 대략 11~13척 정도이며, 돌기둥 위를 3장의 장대석을 건너지른 다음 그 위에 다시 귀틀돌을 놓아 청판돌을 받게 한 구조이다. 기둥돌 아래에는 물밑의 받침돌이 네모난 주춧돌을 지탱하고 있으며, 주춧돌 사이에는 포석을 깔아 기초를 단단히 하였다. 따라서 물이 줄 때는 이 포석 면이 드러나 마치 지금의 잠수교와 같아 ‘이층다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돌기둥은 흐르는 물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큰 혹띠기로 표면을 가공하였고 조립할 때 잔돌을 많이 사용하여 뜬 곳을 메꾸었으며 돌난간은 없다

고종 때 경복궁(景福宮)을 중건하면서 살곶이다리의 일부를 가져다가 석재로 썼다고 하지만 확인할 수 없다. 1913년에 다리 윗면을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보수하였으며, 1925년에 서울 지방의 을축년 대홍수로 다리 일부가 물에 떠내려간 채 방치되었다. 그 후 1938년 5월에 이 다리 옆에 성동교가 가설되자 이 다리는 방치된 채 최근까지 내려오게 되었다. 1972년에 서울시가 무너진 다리를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하는 과정에서 하천의 폭이 원래보다 넓어져 있었기 때문에, 다리 동쪽에 27m 정도의 콘크리트 교량을 잇대어 증설함으로써 원래의 모양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2009년 12월 서울시 성동구가 발굴조사를 거쳐 살곶이다리 복원에 나선다고 밝혔다.[1]

살곶이는 청계천이 한강으로 흘러드는 지금의 성동구 왕십리, 한양대학교에서 내려다 보이는 개울 부근이다. 즉 사근동 남쪽에서 성수동으로 건너가는 곳을 말한다. 이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서울 최고(最古)의 다리일 뿐 아니라 세종대(世宗代)에 유명한 건축가인 박자청(朴子靑)과 유연현(柳延顯)의 감독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살곶이 다리는 정종과 태종의 잦은 행차 때문에 세종 2년(1420) 5월에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으나 태종이 죽자 왕의 행차가 거의 없어 완성되지 못하였다. 그 후 이 길을 자주 이용하는 백성들 때문에 다시 만들 필요성이 제기되어 성종 6년(1475)에 다시 공사를 시작하여 성종 14년(1483)에 완성되었다. 마치 평평한 평지를 걷는 것과 같다하여 ‘제반교(濟盤橋)’라고도 불렀다. 그래서 『한경지략(漢京識略)』권2 교량조(橋梁條)에는 공식명칭이 제반교라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고 『용재총화(傭齋叢話)』에 의하면 “스님이 살곶이 다리를 놓으니 그 탄탄함이 반석(盤石)과 같다 하여 성종이 제반교라 어명(御名)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제반교가 언제부터 살곶이 다리로 불리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 고장 지명이 살곶이평(箭串坪)이라는 데서 온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동으로는 강원도 강릉(江陵)으로 가는 길이 있고, 동남쪽으로는 송파(宋坡)에서 광주(廣州)·이천(利川)을 거쳐 충주(忠州)와 죽령을 넘어 영남으로 이어지고, 남쪽으로는 성수동 한강변에 이르는 교통상 중요 선상에 놓여있다. 또한 이곳은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 또는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다리의 규모는 길이가 76m, 폭이 6m이며 돌난간은 없다. 좌우교대는 장대석 석축이고 중간에 교각석주 21열을 세우고 1열에 기둥 네 개를 배치하였다. 다리의 형태가 종횡(縱橫)으로 곡면을 이루어 조화롭고 면밀하게 구축되어 있다. 기둥은 유수(流水)의 저항을 줄이기 위해 마름모꼴로 되어 있다. 교각 위에 하천방향으로 멍에돌을 3개 연이어 걸치고 멍에돌 위에 귀틀돌을 가로 걸쳐 놓은 구조로 되어있다. 특이한 점은 교각 4개 중 가운데 2개의 교각을 15 내지 40㎝ 가량 낮게 만들어 이 다리의 중량이 안으로 쏠리게 하여 다리의 안정을 꾀하려 했다는 점이다.
고종대에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이 다리의 석재를 이용했기 때문에 다리의 일부가 손상되었다고 하며, 1913년에는 일본인들에 의해 상판에 콘크리트가 덮여지고, 1920년에는 집중호우에 의해 다리의 일부가 떠내려가 방치된 것을 1971년에 보수 복원하였다.

 

살곳이에서 되돌아오는 길은 어둠이 내려

가로등이 밝게 빛나고

다리건너 휘황한 불빛에 쌓인 고층건물과 아파트군은

외국의 도시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평소에 와 보고싶었던 곳이라니까

다리 끝까지 한번 가 보잰다.

 

손녀들이 걷다가 지쳐 잠깐 앉아서 쉴때

 얼음물과 시원한 과일을

 제까닥 대령해야 해해거리며 좋아하니..

죽으나 사나

 저 베낭은 내 등에서 떨어지질 않고

껌딱지처럼 붙어살고 있으니

나와는 일심동체나 마찬가지이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시야를 가로지르는 전철도

밤 에 보니 너무 아름답다.

드디어 우리동네...

 솟대가 반겨주는 금호나들목으로 돌아왔다.

 

교각사이로

 온통 파란불빛이 명멸하는 동호대교가

손에 잡힐듯 그림처럼 예쁘다.

 

 

강 건너 압구정동의 아파트들도 휘황한 자태를 드러내고..

뒤에 보이는 아파트가 서울숲 푸르지오

우리가 살고있는 아파트이다.

마지막 30분은 쉬기도 할겸

겸사겸사

유리가 운동 끝날때까지 앉아서 기다려주는 시간이다.

 

우리 지원이가 찍은 내 모습을 보니 

손녀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그리 흐뭇했었나?

 

 

'일상다반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계 최대공항 오헤아전경  (0) 2014.11.18
지원이를 위한 작별파티  (0) 2014.08.24
지원이와 유리 태권도 등록  (0) 2014.06.21
그립던 한강수변공원  (0) 2014.06.21
에니메이션 리오 2  (0) 2014.0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