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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76년..코티나 디럭스와 운전면허증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46.

새로 지어 우리 동네 골목에서 제일 큰 집을 가지게 된 기쁨으로 그동안 시골 면소재지 가난했던 공의생활과 서울입성 금호동 월세집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힘겹게 살면서 남편의 대학동창들 모임에서도 늘 어깨가 처져있던 남편은 몇 년 만에 놀라운 발전으로 친구들도 선망의 눈으로 남편의 실력을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대학동문들의 모임은 어느 날부터 부부모임으로 변했고 남편과 열네 살이란 차이가 있는 나는
대체로  31년생 대학동문의 또래 나이인 사모님들보다 월등히 나이가 어린 나는 늘 사모님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동문 중엔 나중에 경희대 한의과대학 학장이 되신 이상인 교수님과는 많은 동창생들보다 각별한 사이로 지냈다.

열두 명 정도의 동문들 중 개업한 사람은 남편을 포함 5명 정도였고 나머지 분들은 대체로
고용한의사로 개업과는 길이 달랐고 생각의 차이도 달랐다.

또 자가용을 가진 분도 서너 명이 있었는데 그 당시는 모임이 끝나고 돌이 올 때는 금호동이라면 택시가 승차거부를 하기 일쑤어서 어느 날 갑자기 우리도 자가용이란 걸 사겠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는 거였다.

직업이 한의사지만 자가개업이라 나들이라고 하면 한 달에 한번 동창모임 가는 것뿐인데 무슨 자가용이냐고.. 자가용을 사면 운전기사도 고용해야 하는데 자동차도 비싼데 괜한 기사월급까지 지출하면서 꼭 차를 구입해야 하느냐고 극구 말렸지만..
당신도 이제  열심히 일해서 돈도 잘 벌고 있으니 그동안 친구모임 에도 기죽어 한풀 꺾여 지냈는데 이제  남들처럼 어깨 한번 펴고 큰소리도 치면서 살아보고 싶다고..
아무것도 없는 빈주먹뿐인 공의생활하는 나한테 시집와줘서 고맙고 알토란 같은 아이들 삼 남매 낳아줘서 고마운데  연로한 시부모 받들어 모시면서 군소리 한번 없이 스물여섯 어린 나이에 3대 봉제사까지 받들어 모시니 당신도 이제 자가용도 타면서 사모님 소리도 듣고 살아야 하지 않겠다며

당신 어린 시절 6남매 장남으로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태어나 소학교만 졸업하고 어린 나이에 급사로 소사로 머슴처럼 뼈 빠지게 일하며 살아온 걸 생각하면 내 자식들만은 내 뼈가 부서지더라도 호강에 호사를 시켜주고 싶다며 그렇기에 큰아이는 장충동 부자들이 간다는 사립학교도 보낸 거 아니냐고 이제는 내 자식들에게도  자가용을 태워 등하교도 시키는 게 소망이라며 현대자동차에서 나오는 코티나 디럭스를 신청해 놓았다고 한다.

한 달쯤 후
검은색의 의리 번쩍한 늘씬한 새단
현대 코티나 디럭스가  큰 대문을 들어서 마당 한쪽에 멋진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자가용 운전기사로는 구로동에서 버스운전을 하는 넷째 시동생의 친구분이 오셔서
큰아이 등하교와 어쩌다 한 달에 한번 하는 동창 모임에나 소용되는 코티나디럭스..

자동 차를 구입하면서 현대자동차 회사에서 고객에게 선물로 따라온 자동차학원 연수등록증이 있어 나도 운전을 배워보기로 하고 티켓에 적혀있는 그당시 녹번동인지 응암동 인가에 있는 신진자동차학원에 등록을하고 열심히 다녔다..


신진자동차 학원은 면허시험에
대한 필기와 실기를 가르치는 곳이어서 두 달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석 달만에 실기시험에도 합격하여 76년도 10 월 설흔한살의 나이로 자랑스럽게도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게 되었다.
운전 면허증을 받고도 1년 넘게
지나고 하루 종일 하릴없이 한의원 한편에서 심심소일을 보내던
김  기사님이 심심해서 못살겠으니 사모님 운전연수 시켜드리고 자기는 다시 버스운전을 해야겠다며 나를 꼬드겼다.

면허만 땄지 운전대를 잡아본 적 없는 나를 연습하기 좋은 곳이 있다며 지금의 판교를 지나 성남까지 가는 한적한 도로에서 실습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만 해도 트럭이나 몇 대씩 지나다니던 성남 가는 길..
한적한 거리를 달릴 때는 몰랐지만 도심에 나오면 2차선에서 3차선으로 바꾸지 못해 한번은 끝없이 멀리 분당까지 간 적도 있었다.

그렇게 어렵게 운전연수를 한 석 달 후 김기사님이 넷째 시동생과 같은 버스회사에 취직이 되었다며
사모님이 이제 동북학교를 왕복하다 보면 운전에 요령이 생기고 어느 날부터는 도가 틀 정도로 숙련될게 분명하니 겁먹지 말고 동네에서는 저속으로 운행하게 되니 큰 사고 날 일은 없으니 마음 놓고 등하교부터 시켜보라고 하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 김기사님 덕분에..
76년도부터 아이들 등하교를 시켰고 그 후  2016년까지 운전을 하다가 아이들이 있는 미국을 드나들다 보니 자동차도 필요 없어 친지 딸에게 주고  장롱 속에 보관하고 있던  면허증은 갱신해서 무얼 하나 싶은 생각에 2023년 10 월  47년 동안  간직했던 유서 깊은 내 운전면허증을 주민센터에 반납하면서 10만 원짜리 교통카드와 맞바꾸게 되었다.

오랫동안 아이들 삼 남매 키우며 고맙고 요긴하게 잘 써왔던 운전면허증...
지금 생각하니 그냥 기념으로 간직하고 있을걸 괜히 반납했나 하는 아쉬운 마음도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