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42.
451번지에서의 2년여..
소소한 일상 속에 욕심부리지 않았고 남의 것을 넘겨다 보지도 않았고 아이들삼남매가 건강하게 자라주는 기쁨 특별한 걱정이나 근심 없이 가족이 큰소리 내지않고 화목하게 살아갈수 있어 우리에게 다가온 삶이 곧 기쁨이고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갑자기 먹구름이 드리우고 천둥 번개가 치듯 예기치 못한 사태에 억장이 무너지며 불운은 한걸음 성큼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남편이 동업한 지 4년여...
그동안 동업이라고 하지만 일방적인 횡포에 마음을 많이 다친 남편은 한의원에서 일어나는 일은 일절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분위기로 눈치로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것이 환자가 점점 남편에게 몰리기 시작하자 불안감을 떨칠 수 없었던 상대방이 어느 날 갑자기 한의원 문을 닫겠다는 통보를 해왔다.
금전적으로나 명성으로나 무면허 침사였던 상대방은 떵떵거리는 동네유지로 항상 甲의 신분이었고
남편은 乙이 아닌 丙이고 丁 인 상태였기에 4년여를 어떤 말로도 내색하지 않고 가족을 위해 참아왔는데 싫다는 사람 동업 하자고 꼬실 때는 언제고 갑자기 문을 닫을 테니 나가라고 하는말은 우리 보고 죽으라는 말과 같았다.
갑의 권력만 쥐고 있는 게 아니라 돈과 정치적인 힘까지 가지고 있으니 대적할 힘이 없는 우리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 집을 산 것을 후회해도 이미 때늦은 후회였고 집터가 사나워서 이런 일을 당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우리는 죽으나 사나 이집에 명운을 걸어야 했기에 몇몇일 고민에 고민을 더하며 해답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남편은 남의 환자 뺏아간다는 소리 듣기 싫으니 이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자고 했는데 내 생각은 달랐다. 환자는 어디서나 병 잘 고치는 의사를 찾는 게 원칙이니 우리가 오라고 손 내민 적도 없고 개업 잘하고 있는 사람 같이하자고 빌고 빌고 꼬셔서 함께 해놓고 어느 날 갑자기 퇴근하는 사람한테 내일부터 문 닫으니 나가라고?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우리가 서울에 처음 발 붙인 곳이 금호동이니 여기서 죽던지 살던지 결판을 내야지 왜 잘못도 없이 도망가려 하느냐
죽더라도 이곳에서 뼈를 묻자 하며 버티었다.
그리하여 유치원 학부모 중에 건축사가 있어 우리 형편을 살펴 반값에 설계를 해 주시겠다 하고
신축자금이 대략 800 만원쯤 든다니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500 만원 대출을 받고 5년짜리 상호부금 500 만원을 들어 갚는 걸로 하고 나머지 300 만원은
하늘이 두쪽 나더라도 어디 가서든지 빌려야 했다..
그 당시도 집 1채에 300 만원이나 하는 큰돈이었는데 그런 큰돈을
어디 가야 빌릴 수 있을지 눈앞이 캄캄해왔지만 그냥 앉아서 죽을 수만은 없었기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부딪쳐보자 라는 생각은 나도 살고 싶다 어떻게든 살아내야겠다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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