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공작새가 나래를 펴는 아름다운 정원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44.

69년 서울로 이사하고 만 6년..  금호동산꼭대기  판잣집이라도 내 집을 가졌으면 소원이 없겠다던 희망과 소망의 대상이었던 내 집...

건평 20 여평의 첫 집을 마련했을 때의 뛸 듯이 기뻐하며 나도 서울 에서 내 집을 가지게 되었다는 가슴 뿌듯한 자부심은 만세라도  부르고 싶었는데 어느새
대지 114평에 건평 48평이란
대 저택으로 탈바꿈한 것은 동화 속에서나 상상할 수 있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을 타고 허공 높은  천국으로 상승하는 듯
자도 자는 것 같지 않고 깨어 있어도 내 정신이 아닌 듯 단 6년 만에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진 졌단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경의로웠다..

한의원과 주택이 붙어있고 첩약을 지을 약제사도 숙식을 함께 하다 보니 식구는 어느덧 아홉명의 대가족이 되었고 한의원을 찾는 환자가 늘어 남편은 저녁 늦도록 진료하느라 식사를 제때에 챙기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지만 반비례로 수입이 늘어 희희낙락 기쁜 비명을 지른다고 나 할까..

남편 요한 씨도 지금의 성공이 꿈만 같다며 쾌적하고 아름다운 집을 만들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층고가 있던 나머지 60 여평의 땅은 5차 분량의 정원석으로  계단식 정원을 조성하고 정원 넓은 중앙에는 초록색 플라스틱을 입힌 철망으로 큰 우리를 지어 공작새 1쌍과 금계 오골계 꿩,등 가금류 등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공작새가 시시때때로 부채꼴같이 아름다운 초록의 나래를 펴고 보란 듯이 거닐고 금계와꿩이 황홀한 깃털을 뽐내며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걸 보노라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마치도 천국과도 같은 느낌이었고 하루하루가 감사의 나날이었다

집 앞 통학로를 통해 옥수국민학교 에 다니는 학생들이 공작새를 보려고 기웃거리기 시작하자 우리 집 대문은 언제나 학생들을 위해 열려있었고 봄이면 뒷 담벼락엔 샛노란 개나리가 무리 지어 꽃을 피우고 정원은 복사꽃 살구꽃 능금꽃으로 향기로운 꽃냄새가 가득하고 정원석 사이사이로 사철나무와 철쭉들이  푸른 잎을 피워 올리면 창경원 벚꽃구경이 부럽지가 않을 정도였다.

나의 남편 요한 씨..

어린시절 너무도 가난하여 공교육이라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열네 살 때부터 탄광의 병원에서 조수랍시고 허드레 청소일하면서도 독학으로 밤을 지새우는 성실함에 광산 병원 원장님께서 너무나 아까운 인재라며 서울 서대문에서 외과 병원을 개업하고 있던 형님댁에 조수로 보내 병원 뒤치다꺼리를 하며 어깨 너머로 처치의술을 배우며 나도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며  6ㆍ25 사변 때는 군대에서 위생병으로 부상병들 치료하다 포탄에 복부 관통상을 입고 의병제대한 후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여 대입검정고시로 경희대 한의대 전신인 동양한의대에 입학하여 졸업했고 한의사 자격고시에 합격했으며 그후 무의촌 공의로 선발되어 서울대학교 에서 보수교육을 받고 한지의사 자격증을 땄고
영주군 안정면에 2년 단산면에서
3년 동안 공의생활 하면서 결혼 했고 영주읍내에서 3년간 한의원 을 개업하다가 69년 서울 오면서 한 번도 자기 명의의 집을가져보지 못한 요한 씨는 나이 40에 넓은 대지에 한의원이 딸린 웅장하리 만큼 드넓은 슬래브집을 장만한 것이 이 세상의 어떤 호화주택 과도 비교할 수 없으리 만큼 가슴 뿌듯했고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 평화롭고 행복이 넘치는 지금의 성공한 삶을 위해 밤낮없이 헌신하고 노력하여 이룬 것이기에 너무나 자랑스러워했다.

이 아름다운곳이 바로 우리 가족 들이  꿈속에서 늘 그려오던
home, sweet home,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