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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우리가족 들의 본적지 451번지.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39.


남편이 동업으로 근무하던 한의원과  두 집 건너 골목..

마주 보이던 3층건물
바로 아랫집 451번지로
이사를 하게 된 것도
4 가구 세입자들의 전세금이 있었기에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 집을 사게 되어 여간 다행히 아니었다.

본채와 조금 떨어진
법당이 있는 반층 위에
큰 방에서
시부모님이 거처하시고
법당으로 쓰던 곳엔
금방 소용되지 않는
집기들을 보관할 수 있어
거처하는 공간에 여유가 있어
생활 하기에  홀가분했고
또래인 세입자 자녀들과 금방 친해진  우리 삼 남매는
마당 넓은 집이 마치도 아이들 천국처럼 매일매일이 즐거운 웃음소리로 떠들썩하였다.

나는 명색이 새집의 안주인이었지만 미리부터
오랜 세월 살고 있던
세입자들보다 나이가 어려
함께 사는 방법도
그분들께 배우며 오순도순
참 정답게도 살았었다.

제일 큰 다행인 것은
식사 때 외에는 얼굴을
마주할 필요가 없어진
시아버지의 잔소리와
고성이 수그러진 것이다.

여러 가구가 한 마당을 쓰며 복작대니 아버님께서도
단독에 살 때처럼  
며느리에게  막무가내로
소리 지르기가
눈치가 보이셨는지..
아니면 조금씩 가난의 티를 벗어나고 있는 며느리가
눈치가 보이셨는지
집안에 큰소리 나지 않는 것만도 사람이 사는 것 같았다.

451 번지로 이사 와서
제일 큰 기쁨은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큰아이도
그토록 소망하던  
그 당시  명문사립
국민학교인  
동북국민학교를
보내게 된 것이다.

지금의 앰배서더 호텔 앞에 있던
동북초등학교는 옥수동까지 동북마크가 달린 스쿨버스를 운행하였고..
자주색 교복에 가방을 메고
금남시장 앞 도로에서 동북학교 스쿨버스를 타고 오갈 때마다 가슴속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뿌듯함..

그 시골태생 가난에 찌들어
고생만 주야장천 하던 내가 서울에서도 장충동 부자들이 자녀들을 보낸다는
명문 사립학교에 나도 아들을 보내게 되었다는 그 환희
그 기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크나 큰 감격이었다.

뱁새가 황새걸음을 걷다가 가랑이가 찢어진다는 속담이
나를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르지만
가랑이가 찢어지더라도
그 치솟는 환희를 그 누구가
그 어찌 꺾을 수가 있었을까???

동업 중이던 한의원도
계속 성업 중이며
원래부터 침술로
이름을 얻어 침을 맞으려고
새벽부터 줄을섯던 환자들이
남편의 자상한 진료와 정확한 처방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자 침보다는 약이라며 남편에게 진료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기에 면허만 빌려주고 놀고먹으며 빈둥대며 수입의 반을 가져오는 한의사가 아닌 제대로 제 몫을 해 내는 한의사로서 명망을 다지며
단골환자들을 늘려가며 대기환자가 줄을 서기 시작하자
남편의 어깨에도 힘이 실리기 시작했고 떳떳하게 벌어오는 안정된 수입으로 서울생활 중 최고의 안정감에 젖어든 우리 가족은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소리 속에   집안은 늘 평화롭고 즐거움으로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