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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사역사박물관

오데사 역사박물관 노예제도 반대한 퀘이커교도

                     작은 촌락이던 오데사가 강을 통한 교역으로 점점 부유해지고 

늘어나는 인구로 발전하자 새로운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하고

수십만 에이커의 땅을 택지로 개발하여 아파트를 짓는다는 소문이 있자

초등학교선생님이  아파트 부지로 팔린 1700년대 대 저택과 부지를 사들였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부인이 듀퐁의 여동생이었다.


그러고보니 

프랑스 이민자이던 듀퐁가문의 막대한 재물은

필라델피아와 델라웨어를  좌지우지하는

지금으로 말하면 삼성가처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던듯...


이 저택을 처음 지은 사람은 퀘이커 교도로서 

부인이 세명 있었다고한다.


옛날에는 사람들의 무지로 인해 

화장실의 정화조 시설이 없어 오물이 가까운 우물로 스며들었고 

또 펌프로 오염된 우물을 길어 사용하게되니 

원인불명의 장염이 만연하여 특히나 부인들의 수명이 짧아

새로운 부인을 얻을수 밖애 없었다고 한다.


그 시대 우리나라..조선 시대에는

뒷간을 가자면 한참이나 돌아가는 뒤꼍에 자리하고 있었고

우물은 앞마당에 있었으니

우리가 오히려 문화민족이던가?


피에르듀퐁이 좋아하는 그린색의 중국 비단의자를 

이곳에서 다시 만나보게된다.


언제봐도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그린색의  중국비단은 

그 시대 부호들의 선호 색감이었을까?

귀하디 귀한 대리석으로 벽난로도 만들고...

덩쿨나무 꽃무늬로된 침대보도 퀘이커교도인 부인들의 솜씨였을까..


사방탁자와 함께 수입된 중국 채색 도자기들...

제일밑에 있는 항아리가 요강이었다고 하는걸로봐서

남성이 사용했던게 아닌가 싶다.


미국에서도 그 옛날 요강을 사용했다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밤중 자다깨어 화장실 가기가 거북했을테지..^^


그 시대에는 

오데사 최고의 갑부였으니 취할수 있었던 방법중의 하나가 

에나멜 페인트로 방을 마감했다고 한다

벽난로의 그을음 때문에 반짝거리는 페인트를 사용했다는데 

1700년대에는 최첨단 

엄.청.난. 돈을 들여 인테리어를 한 셈이다.






1700년대 여성들의 외모를 가꾸는데 필요한빗과 거울

머리를 다듬는  길다란 가위도 보인다.

아이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기 위한 수예작품..


퀘이ㅣ커교도들은 대체로 다산을 받아들여

6~7명의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것이 상례이고

이 댁에는 유모가 상주하고 있어 바느질과 주방일

부인이 낳아놓은 아이들을 젓을먹여 키웠단다.

퀘이커 교인들은 여자는 바깥일을 안하기 때문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림을 하고

물레로 실을 잣거나 수를 놓거나 모든것을 자급자족하고 살았고 

여자들의 여가 틈틈히 아이들에게 전수해주는 스탠실은 

정말 이루말할수 없이 예뻤다.

옥상층에 아이들의 놀이방이 꾸며져있고.

오른쪽 하얀 냄비처럼 보이는것이  뚜껑덮인 그릇이 요강이고

저 안락으자에 않아 볼일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고종황제도 저런 의자에서 볼일을 보셨을래나?



지붕 처마밑에 한사람이 누우면 깍맞는 비밀 창고가 있어 

발각되면 전 재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가야하는 상황임에도

당황하지않고 도망쳐온 노예를 이곳에 숨겨준 부인의

정의로운 결단심이 존경받을만 하였다.

이 잘생기고 돈많은 갑부도 부인을 일찍사별하게되고 

세명의 부인을 거느렸다고....








지금 둘러보면 그리 큰 집이라고 할수 없지만

그 시대에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최고급 사양의 대 저택 이었다고하니...

예날 50여년전...

금호동 산꼭대기 지붕 너덜거리던 천막지이라도 좋으니

 재발 하느님 내 집 한칸 지니게 해줍소사...하고 

아침 저녁 지극정성 소원빌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정말 돌이켜보면

미국을 앞집 드나들듯하는 나는....

사람들이 일컽는 개천에서 용 난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