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11월 4일
어제 밤에 무사히 뉴욕으로 돌아왔읍니다.
2박 3일은 아무래도 너무 아쉬운 것 같네요..딸린 식구만 없었어도 시카고에서 더 있다 오는건데..
시카고에서 엄마랑 식구들이랑 좋은 시간 보냈구요,아버지랑 큰오빠네가 없어서 아쉬웠어요.
엄마는 생일 이브랑 생일 당일날 계속 놀랄 일만 있어서인지 정신을 못 차리더라구요.
실은 공항에서 저도 깜짝 놀랐어요.
각본대로라면 새언니가 혼자서 공항에 저를 마중 나왔어야 하는건데 엄마랑 같이 나온거예요.
저도 엄마를 보고는 너무 놀라서 각본에 없는 에드립을 쳤죠.
"엄마! 엄마가 왜 여기에 온 거야?"
그런데 엄마는 저를 한동안 못 알아보더라구요.
차를 타고 제가 서있는 곳으로 오면서도
'저 앞에 서있는 저 여자는 어쩜 우리딸하고 저렇게 닮았을까..' 했지 저라고는 상상도 못했대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딸내미도 못 알아보다니..
하긴 제가 너무 너무 바빠서 숨 쉴 틈도 없다고 미리 엄살을 떨어놨거든요.
그러니 엄마로서는 제가 시카고에 올줄은 아마 상상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공항에서 둘이서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고 기뻐하다가 오빠네로 가보니
전날의 성대했던 잔치 분위기가 아직도 그래도 남아있었어요.
온갖 부침이며,새우 칵테일이며,완전 퓨전음식들이 냉장고에 가득하고 냉장고에 아직
못 들어가고 대기 중인 인절미랑 무지개 떡들이 저를 보며 부르르~~
요 놈들,이게 왠 떡이냐~~ 한번씩 귀여워 해주고는
엄마랑 수다 보따리를 풀려는데,마침 그날이 할로윈이어서 동네 미국에들이 이른 오후부터
벨을 누르고 쵸컬릿을 달라고 야단 법석을 해댔어요..쟤들은 학교도 안가나...
조금 후에 사돈 어른이 유나랑 사돈처녀 사랑이를 학교에서 데리고 오시는 소리가 들리길래
저는 얼른 입고 갔던 오리털 긴 파카를 뒤집어쓰고는 현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어요.
유나가 벼락같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오면서
"할머니~ 내 마법사 옷, 빨리 빨리~ 옷 입혀줘 빨리 빨리~" 난리법석입니다.
그러더니만 "어? 문앞에 보따리가 있네?" 하는거예요.
아니,육백만불의 고모를 보따리로 보다니,물건 보는 눈이 아직 없읍니다.
홱 파카를 제끼고는 저를 보더니만 "고모~~" 하면서 제 목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는거예요.
많이 보고 싶었나 봐요.
조그만게 손힘이 어찌나 센지 목 부러지는 줄 알았어요.
사돈 어른께 인사도 못드리고 유나랑 같이 바닥에 엎어져서 한참을 달래주고는 겨우 앉을수
있었어요.
유나는 콧물 눈물이 범벅이 된 꼬질꼬질한 얼굴로 제게 묻는거예요.
"고모,화분 가져왔어?"
제가 지난번에 오면서 화분에 물주러 간다고 했던걸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예요.
울고 짜는것도 잠깐이지 쵸컬릿 받으러 나간다고 뒤도 안 돌아보고 쌩 하니 달려 나가는거 있죠?
엄마는 생일 날인데도 일복이 터졌읍니다.
제가 앤디 바지단이 너무 짧아서 게이 같이 보인다고 했더니만
재봉틀을 꺼내서 밑단을 다 뜯고 안에다 새로 천을 대서 바짓단을 늘여 주었어요.
아이고,제가 미쳤지..
신랑 이쁘게 보이게 할려고 허리 아픈 엄마한테 바느질 감을 들고 가다니 말예요.
저녁땐 엄마가 좋아하는 바베큐 하는 집에 가서 맛있게 식사하고..다이어트 말짱 꽝입니다.
집에 와서 12시가 땡 치자마자 엄마는 생일이라고 대접받던 왕비님에서 곧바로 신데렐라로
전락해서 일을 합니다.
콩을 삶아서 메주를 쑤고,마침 새언니도 2주일간 출장을 가는데 밑반찬 만들고..
저는 유나 뒷치닥 거리 담당이죠.
유나는 평소엔 할머니 치마꼬리만 붙들고 있다가도 제가 가면 제 손을 놓칠 않아요.
제 행동 반경은 항상 유나의 시야 안에서만 자유롭습니다.
화장실도 혼자서 잘 못가고 꼭 유나 허락을 받아야 혼자서 화장실 갈 수 있읍니다.
아니면 국민학교때 했던 것 처럼 유나랑 같이 들어가거나요 ㅎㅎㅎ
화요일,수요일 아침에는 엄마랑 같이 유나를 학교에 데려다 주었어요.
지난번에 왔을때 담임선생님도 만나봐서 저를 기억하고 있더라구요.
선생님이 아는 척을 하니까 유나가 대뜸 "우리 고모는 싱어예요" 하는거예요.
앗..유나야..안돼.....아 씨~ 화장 하고 올껄....
화장도 안한 맨 얼굴에 부시시한 파마머리,날씨가 춥지도 않은데 감기 걸릴까봐 지레 겁먹고
두꺼운 오리털 파카에다가 유나의 인어공주 그림이 들어있는 야광분홍색 장갑까지 끼고 있었는데.
그런데 선생님이 "아~ 어쩐지 이쁘더라~" 하시는거예요.
선생님 최고!!
미국인들에게는 노란얼굴에 눈이 쭉 찍어진 동양인들이 굉장히 매력있다고 들었거든요.
그래서 신랑도 제게 애교를 떨다가 밑천이 떨어지면
"허니,유 아 소 뷰티풀....그리고...유 아 소 옐로.." 한답니다.
어쨌든 유나의 그 한마디에 선생님이 제 경력을 묻더니만 아이들을 위해서 노래해 달라고
바로 청탁 들어왔읍니다.
"잘 키운 내조카 열 찍새 안부럽다 " 입니다.
추수감사절 기간 중에 일주일 동안 다시 시카고 가는데 그때 신랑이랑 둘이서 아이들을 위해서
노래 해주기로 했읍니다.
제가 하는 일이란 주로 유나가 집에 오면 숙제 봐주고 같이 놀아 주는건데,
이번 숙제는 신체명칭을 노래에 붙여서 외우는 건데,
우리가 했던 "머리,어깨 무릎,발 무릎 발~~" 이런 수준이 아닙니다.
두개골,상악,하악,삼두박,이두박,경추골,척추,골반,대퇴부...이런 용어더라구요.
아주 애를 잡아라~~
저도 너무 생소한 단어라 사전 찾아가며 가르친다고 큰소리를 치는데,
유나는 기특하게 곧잘 따라하는거예요.
이제 동작과 같이 신체 부위를 가르키면서 노래를 외워야하는데,
머리 속에서는 "유나야, 선생님한테 배째라 그래~" 그랬지만
입으로는 "유나야,이렇게 쉬운 걸 금방 외워야지.." 해가면서 닥달했어요.
그 노래를 한 백번쯤 하는데도 유나는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음.음.음" 으로 때우곤 합니다.
잘 할때까지 시키다보니 오히려 어른들이 그 노래에 노이로제 증세를 보이길래
그래..생긴대로 사는거야..때려치자..이런거 몰라도 인생에 아무 문제 없다..
유나에게 힘이 되는 말을 해주었죠..좋은 고모입니다.
저는 오빠 책장에서 책을 한권 빼가지고 일찌감치 자리에 눕고 유나도 제 옆에 파고 들어서
제 귀에 대고 "크레니엄,맨더블.."하면서 여전히 그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제가 보고 있던 책을 탁 쳐서 덮어버리는 거 있죠?
"뭐야,유나~ 고모가 책 보는데 왜 그래?"
"안돼,고모는 이 책 보면 안돼!"
"왜? 이건 재밌는데 책이야.."
"안돼 고모는 이제 스물 다섯살(세뇌교육의 효과입니다) 이니까 이 책 못봐. "
제가 보고있던 책이 1999년도 이상 문학상 수상집이었는데
제 오른쪽에 누워있던 유나는 책 뒷면의 줄여서 쓴 제목 99이상문학집 이라는 걸 봤나봐요.
유나는 "99살" "이상" 만 읽는 거라고 생각한 거죠.
핫핫핫,귀여운 놈..
뉴욕으로 돌아오는데 유나가 울먹 울먹합니다.
"고모,안가면 안돼?"
"고모가 가서 앤디 옷 예쁘게 입혀가지고 데리고 올께,기타 가지고..그래야 고모랑 앤디가
학교에서 노래 불러주지.." 달래서 겨우 떼놓고 왔어요.
엄마는 그새 메주를 반듯하게 빚어서 차고에 나란히 세워놓고,이제 제 짐 속을 조사합니다.
제가 오랜만에 보는 인절미라 몇쪽 집어먹었더니,눈여겨 보았다가
언제 얼려놓았는지 인절미랑 무지개떡이랑 싸주고,연근조림에 ...쌈짓돈까지 꺼내서 쥐어줍니다.
친정도 아니고 오빠네 살림 축내는것 같아 눈치보이는데,오빠는 한술 더 떠서
지하실을 뒤져서 이것 저것 자꾸 들고 올라와서 가져가라고 안겨줍니다.
역시 친정은 이래서 좋은건가봐요.
갈때는 간단하게 싸가지고 갔는데 올땐 짐이 더 늘어서 바리바리 싸가지고 왔어요.
그리고 헤어짐은 언제나 마음 아프죠.
이번에는 오빠가 너무 바빠서 저를 공항에 데려다 줄수 없어서 택시를 불렀는데
간다고 짐 싸놓고 현관에서 기다릴때만 해도 유나는 자전거 타면서 신나게 놀더니만
택시가 도착하니까 얼굴이 좀 울먹울먹하더니,제가 택시 타니깐 바로
"와~앙" 울어 버리는거예요.
아이고,이쁜 내새끼~
고모가 얼른 돈 벌어서 집사면 같이 살자~
그래도 앞으로 3주일간 정신 없이 바쁘니깐,너무 이기적이지만 당분간 유나 잊어먹고
제 할일 열심히 해야죠.
이제 동요를 죽어라고 공부해야 하구요.
덕분에 2박 3일 동안 너무 너무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특히 제 부탁을 들어주신 금호동 성가대 어머니들,엄마 동창분들 너무 감사하구요,
특히 뉴욕 한인 성당의 프란치스코 신부님,일부러 엄마께 전화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엄마 생일 차려주신다고 하신거 ,저 안 잊어 먹고 있어요 (딱 걸렸어요,신부님!!)
엄마가 한국 가시면 다시 환갑잔치 하실거예요,그때 모두 참석하셔서
엄마의 새로운 돌잔치를 빛내 주시길 빕니다.
항상 금호동 소식 궁금해 하시니까 자주 메일 주시구요,
어디 놀러가실 일 있으면 미뤘다가 내년에 저희 엄마랑 같이 가세요.
저는 삼주 후에 시카고 다시 가서 연락 드릴께요.
모두들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서 연준 글라라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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