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2일
사무엘 듀퐁의 뮤지엄
듀퐁은 1916년 루스
웨일스Ruth Wales와 결혼하였고, 1923년 아내와 함께 버몬트의 한 농가를 방문한 이후
미국의 골동품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처음으로 구입한 1737년산 펜실베이니아
궤를 시작으로 그는 미국의 장식미술품과 건축학적인 요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928년부터 1931년까지, 듀퐁은 대규모로 하우스를 확장하였고 175개의 방을 만들어 초기
미국 건축 양식에서 중요한 내부 장식들을 테마별로 수집, 전시하였다. 당시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유럽의 문화, 예술, 가구에 빠져 있을 때, 그는 미국인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진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듀퐁은 곧 이 분야에서 수준 높은 감식안과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는 뉴욕의 쿠퍼 박물관을 살리는 일을 도왔고, 존 F.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재클린 케네디Jacqueline Kennedy가 12명의 백악관 복원위원회를
구성할 때 의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힘들게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을 보낸 한 소년이
원예가이자 젖소 사육 전문가, 미국의 손꼽히는 예술품 수집가로 변모한 것이다.
1951년 헨리 프란시스 듀퐁은 마침내 그의 어린 시절 집이자 박물관인 윈터투어 하우스를
대중에게 개방하였다. 또한 그는 델라웨어 대학교와 결연을 맺고 미국 장식미술에 대한
학위 과정을 개설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1915년부터 1958년까지 듀퐁사社의 이사로
재직했으며, 제너럴모터스사, 필라델피아 미술관, 뉴욕 식물원을 비롯한 다른 문화기관의
디렉터 및 이사, 그리고 델라웨어 대학교의 재단이사로 재직하였다.
박원순 Park, Won Soon·미국 델라웨어대 롱우드대학원 석사과정, 연구원
듀퐁이 수집한 골동품들은
금방이라도 사용할수있게
전시되어 있었고
전시실을 관람하는 내내
175개의 방을 아름답게 장식하는 꽃꽃이가
새롭게 바뀌면서 향기를 더해 주었다.
해설도우미 봉사자의 이야기는
필기를 할수있되 볼펜은 안되고 연필은 가능하단다
사진을 찍을수는 있지만 삼각대 사용은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전시실 관람할때 주의 사항은
바닥에 깔려있는 카펫을 벋어나면 안된다고
행여라도 있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위한 규칙이라고
도우미 아줌마가 자상하게 알려주었다.
헨리 듀퐁은 그린색을 너무 좋아하여
곳곳에 그린의 콜렉션들이 눈에 띄었는데
수~수~십년전
거의 한 세기전에 구입한
초록의 중국비단으로 만든 암체어가
불빛아래 고상한 품위를 드러내고 있었다.
모든 가구는 대칭을 이루고 있었고
남성과 여성의 자리를 뚜렸이 구별해 놓은게
방 하나를 양쪽으로 갈라
벽 면 한쪽은 여성스럽고 우아하게
반대편쪽은
남성들을 위한 코너로 장중하고 격조높게
장식하고 배치한것이 특이했다.
레이디 퍼스트인 미국에도 이런 시대가 있었나 싶은게
남녀가 한 식탁에 앉지 못했다고 한다.
175개의 방 마다
사방의 벽은 진귀한 도자기들과 수집한 골동품들이
휘황한 불빛아래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이 중국의 본 차이나 도자기들은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이 취임식에 쓰였던..
당시에는 어마어마한 값을 지닌 진귀한 품목이었었만
듀퐁의 큰딸이 결혼할때
혼수품으로 마련한 것들이라고 하는데
현재 생존해 있는 90이 넘은 큰 딸이
도자기들을
다시 박물관에 기증하여 전시되고 있다고한다..
딸 사랑하는 마음과
시집가는 딸의 호화 혼수품 마련하는것은
동서양이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아름답고 격조높은 동서양의 도자기들이
어떻게 듀퐁의 눈에 들어
지금껏 빛을 잃지않고 존귀한 대접을 받고있을까???
저 그릇들을 빗어낸 장인들의 예술성에 감탄을 금할수 없었다.
부자라고 다 안목이 높은것은 아니었을진데
섬세하고 예리하고 아름다움을 뛰어넘는 헨리듀퐁의 콜렉션을 보면
감탄사가 신음처럼 터져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