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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집의 추억을 그리며!!!

 

내가 태어난 곳은 그 당시 영주 시에서 가장 번화한 중앙통이었다

어렸을때 기억은 5일장이 서면 지금 버스가 다니는 이 중앙통 한가운데

수십개의 천막이 들어서고 이정표가 붙어있는 곳에서 부터 아래로 거의 300미터 정도를

사방 도처에서 몰려든 장사꾼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던 곳이다

 

비단에서 삼베에 유기에서 가위 낫.

얼레빗 대소쿠리 홍두깨 안반 다듬이 방망이..

쌀이며 잡곡 엿이며 콩강정이며 옥수수 튀밥

별과자 눈깔사탕 고무풍선에 이르기 까지

놋요강 사기요강 인조 광목 뽀뿌린..목화며 석유며 양초며..

 

5일장의 모든것은 오로지 중앙통에서 이루어졌던

영주 가근방의 4~50리에 거주하는 면민들의 생필품이 바로 이 중앙통에서

사고 팔수 있었으니 장날이면 발디딜 틈조자 없던 시절이

불과 60여년 전이었구나... 

 

우리집 앞으로는 미곡상들이 됫박질을 잘 깎아 벌어먹고 살았고

우리집 담 옆으론

새벽부터 종종걸음으로 달려나온 떡장수 아줌마들이 진을 치고 있던길..

 

일년에 두어번

 

공짜로 상영하는 활동사진은

초처녁 부터 몰려온 가근동 면민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던곳..

대한늬우스 리버티 니우쓰는

우리집 방문위에 흰 포장을 치고 상영했기로

아침부터 몇십리밖에서 부터 몰려들어온 친척들은

우리집 사랑방에서 편히 앉아 보기도 했었지

영화상영 하는날은 친구들도 팥방구리 쥐 드나들던

우리집을 들랑거렸던 옛생각이 아련하다.

 

 

 

 

왼쪽의 세무사사무실이라고 쓴 건물이 소방서 건물이었고

 

동서가구가 입점해 있는 건물이 예전 우리집이다

집앞 인도쯤엔

장날마다 미곡상들이 즐비하게 자리를 잡고있었고...

오른쪽 주차되어있던 골목길 쪽으로는

대여섯명의 떡장수 아줌마들이 떡시루를 앞에놓고

떡을 팔고 있었는데

간혹 어린 내가 집앞을 들랑거리면

주인집에 신세진다며 인절미며 가래떡을 내 손에 쥐여주기도 했었지

 

내가 결혼할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는데...

두 필지어서 가운데 돌을 박아 필지 구 분이 되어있었던 마당에

그때는 집이 두채로 나뉘어 지었었고

나중에 세째오빠가 대학에 갈때 학자금으로 쓴다며 윗채만 따로 떼어 팔았고

아랫채는 큰 오빠 몫으로 내가 결혼 할때까지 살았는데

그때만 해도 그 컷던 옛집이

오늘 다시 가서 보니 왜 그리 작아져 있는지...

 

 

 

우리가 살았던 이 집은 뒤쪽으로 상당히 길어 닭장이며 나뭇간도 있었고

아랫채만 해도 방이 6개에다 큰 대청 커다란 부엌

윗채는 이칸장방이 두개에다 부엌이 따로 있고 대로쪽으로 큰 가게가 세개가 있어

미곡상 하는사람들이 세를 들어 있었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 윗채를 떼어 판 것이 안동서점 자리였었나?

내가 열댓살 무렵이어서 가늠이 잘 안된다

 

내가 태어난곳....최외과자리...

 

 

해방 전 일제시대 부터

아버지께서는 이재에 밝으셔서 말도 수십필을 가지고 계셔서

 물건 조달도 도맡아 하시고 큰 양조장과 여관을 갖고 계셨다고 한다

 

지금의 최외과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아흥 아홉칸짜리 터에 큰 여관을 하셨는데

그 당시 중앙선 철도를 놓는 작업에 투입된 기술자와 식솔들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마방에서 말을 조달해서 쓰고

여관은 흡사 특급호텔처럼..

그때는 몇백리 밖에서도  영주와 상거래를 하는 대상들로 항상 초만원이었고

영주의 관공서를 시찰 나오거나 고위층들이 다녀갈때는

언제나 우리집인 중앙여관이 선호도 제 1인

지금으로 말하자면 최고급 호텔같은 곳이어서 그랬는지

경찰서와 우체국 그리고 읍사무소 말고는

개인집으로는 처음으로 전화를 보유하고 있었던것도 우리집이었다고 한다

 

광복자금 얼마를 어디까지 가지고 오라는

독립군들의 화살이 새벽이면 늘 벽에 박혀있었고

이십여개의 객실은 언제나 만원이었으며 

지금도 말 뜻은 잘 이해가 안되는 일본말 "이다바' 

하여튼 종업원들의 수도 십여명이 넘었었다

 

나무 판자를 받침대로 띄운 두개의 커다란 무쇠 목간통은

언제나 뜨거운김을 뿜고 있었고

긴 복도를 통통거리며 뛰어다녔던 나에게

손으로 레바를 돌리고 주물로된 송화기에 대고 모시모시...하던 

 전화기가 유리함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너댓살때의 기억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는 내가 태어난 옛 중앙여관자리

뒷마당엔 수십개의 장독대가 즐비하게 늘어섰고

울타리엔 봉선화와 꽈리가 지천으로 피어있던집..

 

6.25초기에는 후퇴하던 아군 헌병대가 주둔했었고

마지막엔 인민군에게 점거되어

야전병원으로 사용되다 폭격당해버린 옛집..

지금은 어디서도 옛자취를 찾아볼수가 없다

 

우리 윗집은 김길선이라는

나보다 한살위인 중앙초등학교 선배언니네의 비단점이 있었고

바로 두집 밑에 코너집은 물방집이라고...

장날이면 국방색 군복에 검정물을 들여 장대에 매달아 놓으면

겨울이면 얼음이 뻥뻥얼어 시커먼 고드름이 달려있던 영란이네 물방집...

나는 이 집에서 여섯살까지 살다가 윗집으로 이사를 갔었다

 

읍내에서 제일큰 구십아홉칸 짜리 우리집은

백년도 안된 세월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5층인지 6층인지 높은 빌딩으로 바뀌어져 있고

 

 

 

내 어렸을때 영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명헀던 왕서방네 평양 냉면집...

냉면집은 어디로 가고 인성외과라는 간판이 붙어있네.

사진을 찍으려고 옛날에 있던 냉면집 자리가 어디냐고 물으니..

60초반의 아저씨가 왕서방네 냉면집을 찾느냐고 물으신다

그렇다고 했더니 바로 인성외과가 냉면집 자리라고 알려주시네

 

고향 떠나온지 45년...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와 다시서니

산천 의구란말 옛시인의 허사로고!!!

옛 섯던 그 큰 소나무 버혀지고 없구려...

 

라는 노랫말이 새삼스레 떠 오른다

 

 

둘째오빠가 살았던 나무전 골목 우리집은

보승잔디라는 표시를 단체 집터만 남아있구나

이 집에도 뒤꼍에는 염소우리가 있었고

사라호태풍에 집이 쓰러져 새로 지으면서

축대를 높이 올려지어 동네에서 가장 높다랗게 지은 집이었는데

45년만에 돌아보니 옛집은 자취없이 사라지고

집 옆에 흐르던 개울은 동네사람들의 빨래터였었는데

그때의 흔적은 어디에서고 찾아볼수가 없는 아쉬움...

 

 

그래도 이번 여행길엔...

옛자취를 더듬어 볼수있어 어찌나 다행인지

내 어렸을적 꿈과 추억이 담긴 옛집들을 골고루 다 찾아봤으니

이것또한 행운이라고 할수 있겠지

 

백년도 못 사는 짧은 인생

백년도 유지하지 못하는 유서깊은 고향집

하지만 이번여행에서

내 뿌리의 근본 태어난 곳을 찾아볼수있고

우리 아이들에게 본대로 전해줄수 있는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지

다음번엔 우리 조상...

인동장씨  연복군생가를 찾아보기를 다짐하며 귀경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