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동북국민학교 1학년3반의 추억.

primavera1945 2025. 4. 6. 04:29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40.

1974년 3월 5일
동북국민학교 입학식이 끝나고 1학년 3반에 학생이 된 큰 아들.

다섯 살에 한글을 떼고 동화책도 술술 읽는 뛰어난 머리를 가진 영민함에도 네 살 때 합가해서 함께 생활하면서 시시콜콜 쏟아지던 할아버지의 불호령 속에 기를 펴지 못하고 자라서 내성적이고 의기소침한 아이로 변해 있어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1달에 한 번씩 학부형 회의 때마다 담임선생님과 상담도하고 아주 똑똑하고 공부를 잘한다는 담임 조동수 선생님의 칭찬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첫 번 학부형 모임 때
선생님께서 신입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게 학부형의 몫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우리 아들 학급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금호동 달동네에 곁방살이하면서 보낸 성동유치원의 부형들과 달리
높은 담장에 둘러싸인 장충동의 부호들과 약수동 필동 부자들이 주축이 된 동북학교의 학부형은 수준자체가 다른  어마어마한 직함들의 사모님 들이었고
회장님 사장님 판검사 의사 교수님들의  자녀인 금수저 아이들 속에 덜렁 외계인처럼
날아와 박힌 게 내 사랑하는 내 아들이었다.

나는 그 당시 조동수선생님께서 1학년 3반 학생들이 다른 반 아이들보다 더 좋은 조건에서 공부할 수 있는 학급 분위기를 학부형들이 만들어 주십사 하는 말씀에 깊이 감동을 받고
회의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서서 교실문을 나설 때 나는 선생님께 다가가서 여쭈었다.

지금 우리 반 학생들이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요?
하고 물었다. 참 지금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는 게 장충동 부자들을 제치고 필요한 게
뭐냐고 묻는 자체가
내 분수를 모르는 짓이었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정말 그토록 소원하던 사립학교라는 곳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기쁨에
작으나마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내 생각은
방과 후 교실 청소라던가
하다못해 물주전자나
컵 세트 같은 거라도
사다 놓고 싶었기에..

그랬는데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우리 교실에 리듬타악기
세트가 없어
아이들 음악수업이
다른 반에 비해 떨어지니
타악기 세트를 한벌
기증해 주시면 고맙겠다는
말씀이 돌아왔다.

그런 악기들은 어디서 구입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종로 2가 낙원상가라는 곳이 악기전문점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서
국민학교 저학년용 타악기세트라면 알아서
소개해줄 거란 말씀을 들려주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일을 어찌 감당하나 괜히 작으나마 성의를 보인다고 드린 말씀이 큰일을 저질렀구나 싶은 생각에 가슴이 두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하고 심장이 뛰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쿵쿵대고 관자놀이가 펄떡 거리며 뛰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남편과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내가 큰일을 저지른 것 같다고 했더니 남편이 걱정 말라며
내 초등학교 시절은 운동회 때도 먹고살기 바빠서 부모참관은커녕 소금에 굴린 주먹밥 하나 들고 운동회라고 참석하면 배 고파서 달음질도 못해봤다고..

그랬던 내가 어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 첫아들을 서울에서도 첫째가는
사립학교에 넣었는데
까짓 거 ..
내 한 달 월급이 달아난데도
리듬악기 큰맘 먹고
우리가 해줍시다.
돈이란 원래 이럴 때 쓰라고
버는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토요일 퇴근하고
낙원상가 같이가 보자고 하면서
걱정으로 혼이 빠진 나를
다독여 주었다.

그 며칠 후 일요일
낙원악기상가에서  학생들에게 안성맞춤 타악기세트가 우리가 상상한 가격보다 더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걸 알고 겁에 질린 내게 눈치 안 봐도 된다고 걱정 말라며 군소리 한마디 안 하고 거금을 들여 리듬악기를 기증하고 나니
다음 학부형회의 때 참석한 내로라하는 학부형들로부터 진심 어린 감사의 박수갈채를 받고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 후 4학년 말에 동북국민학교는 장충동을 떠나 수유리로 학교가 이사를 하게 되었고 수유리에서 졸업을 하게 되었다.

1학년부터 졸업할 때까지
그 당시 올 백 이라는 게 힘들 때 였음에도 몇 번씩이나 전교에서 All 100으로 이름을 날린 우리 큰아들의 초등학교 시절의 모습들이 지금도 눈앞에 삼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