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 그리던 내집을 드디어 마련했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32.
60년대 질곡의 삶을 살아왔던 내겐 백만장자란 감히 살아서는 꿈도 꾸지 못할 딴 세상의 것이었다.
결혼했을 65년도 영주시의
아담하고 살기 좋은 25평쯤 되는 신축주택의 가격이 20 만환 정도였으니 그 당시
100 만환의 돈을 비축해 놓은 사람이야 말로
집 다섯 채 값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으니
그 가난하던 시절
보통 사람들은 백만장자라는
말의 위력도 느끼지 못했을 때다.
1972년 결혼하고 7년 만에..
천신만고 끝에 십원 한 장도 발발 떨면서 모은 돈이 200여만환
이제 우리는 귓전 너머로 듣던 백만장자가 아니라 이백만 장자의 반열에 들어섰기에 너무나
자랑스러웠고 이 현실이 꿈인지 생시인지 우리에게 찾아온 평생에 3번 있다는 대운이 찾아온 것에 반신반의하면서 우리가 그토록 염원 하던 서울에서의 내 집마련을 이룰 수 있는 것에 하느님께 감사 드리며 절을 올리고 또 올렸다.
그때는 집을 어떻게 사고 파는지도
몰랐고 요한 씨도 40이 되어 처음으로 내 집을 장만하면서 그 시절 60 중반이던 시아버지께서 금호동 여기저기 복덕방을 찾아 다니셨는데 어느 하루 우리에게 딱 맞는 집을 보고 오셨다며 당장 계약을 하지 않으면 남의 손에 넘어간다고 쇠뿔도 단김에 빼내듯이 남편이 한 번도 그 집을 둘러볼 틈도 없이 시아버지 말씀만 믿고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 그 이튿날 당장 계약체결을 했다..
계약을 했다는 비어있던우리집을 한번도 가 본적이 없이 부랴부랴 짐을 꾸려 드디어 이사를 가는 날..
그때는 이삿짐센터도 없는 시절 어떻게 이사를 했는지는 기억에 없는 걸로 무진고생으로 기억을 잊어버린 게 틀림없다.
새로 이사한 집은 언덕길을 올라
차가 다닐 수 없는 더 좁은 가파른 언덕 위 축대 위에 덩그러니 앉은
기와집으로 그 동네에서는 제일 평수도 크고 제일 새집이라 시아버님 눈에 들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집장사하는 두 부자가 손질을 막 끝내고 부동산에 올린 것을 보고 시아버님이 처음으로 그 집을 둘러보았고 맘에 들어하는 눈치가 보이자 여러 사람들이 그 집을 사려고 줄을서 있다며 먼저 사는 사람이 임자라는 부동산의 감언 이설에 두 번도 보지 않고 남편을 앞세우고가서 거금 210 만환에 덜컥 계약을 해버린것이다.
그래도 대지가 47 평 건평 20여 평 방 3개에 대청마루..
부엌 위에는 다락이.. 마당 한편엔 수세식 화장실이 있고 화장실 옆쪽은 부엌이 딸린 넓직한 방이 또 하나 있었고
방 윗부분은 장독대까지 갖춰진 집은 우리 8 식구가 딱 살기 좋은 안성맞춤이란 생각에 시장을 오르내리면서 숨이 턱까지 차올라 허덕대면서도 산꼭대기 판 자집이 아닌 것에 감사했고 내 나이 스물여덟 살에 처음으로 마련한 내 집이 산중턱쯤에 훨훨 나는듯한 번듯한 기와집이란 것에 너무 자랑스럽고 기뻐 며칠동안은 날밤을 꼴딱 세우며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금호 4가 주민센터에서 더 올라간 축대 위의 집이었으니 대우아파트 201동이 들어선 그 자리에 있던 집이었다.
우리 집 위로도 골목이 계속되었지만 골목을 마주한
연수네 집과 그 위쪽에 사는 현정이네집 위쪽으로는 한 번도 올라가 본 적이 없었다.
새집에 적응하며 시아버지께서 경로당에 가시는 낮시간에는
이웃나드리도 하며 옆집
연수네랑 윗집의 현정이네랑 친하게 지내면서 서울생활에 처음으로 친하게 지내는 또래이웃을 만나게 돼서
즐거움이 컸다..
육군 소령이던 남편을 월남파병으로 보낸 연수엄마는 서울 본토박이로 삼 남매와 남녀 두 동생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들 유치원을 보낸 후 시아버님이 경로당으로 놀러 나가시면 연수네 집에 자주모여 부침개도 해 먹고
이야기 꽃을 피우며 그 동네에서는 제일 덩치가 크고 새로 손질을 마친 집에 이사를 온 나를
부러움의 눈으로 보는 이웃들이 있어 어깨가 으쓱해지는 즐거움도 잠시 잠깐..
앞으로 다가올 불행의 서막과 함께 가슴 두 방망이질 치는 두려움과 고통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