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따뜻 하던 누비월남치마의 추억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6.
70년 그해 겨울은 유난히도 추웠다.
양철지붕집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냈는데
이번에는 엄청난
혹한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과는 달리
양철지붕은 차가운 북풍과
눈 내린 겨울은 찬바람에 노출되어서 인지
유난히도 더 추위를
느끼게 하는 건
나만의 상상이었을까?
막내딸의 백일이 다가오도록
몸은 회복되지 않아
점점 더
운신의 폭이 줄어들고
초겨울 날씨에도
이빨을 덜덜 떨며 추위를
못 참는 내가
보기에 딱했던지
딸의 백일즈음
내게
따뜻한 옷 한 벌
사 입으라는
남편의 고마운 배려에
금남시장 옷가게를 누볐다..
음식 먹거리만 사 날랐던
골목과는 달리 옷가게는
마지막 골목에 있었다.
골목 가운데는
난전이 늘어 서 있고
양쪽을 마주 보며
20 여개가 넘는 옷가게가
줄지어 가게 밖으로
옷걸이에 걸린 옷들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내 눈에 띈 것이
그때 한참 유행하던
누비 월남치마였다..
복숭아씨까지 내려오는
긴 기장에 다이아몬드
패턴으로 탄탄하게 누빈 월남치마는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는데 드디어
내게 따뜻한 겨울옷을
사 입으란 허락이 떨어지니
그 누비치마가
1등으로 생각났다..
다시 찾은 옷가게 골목엔
30대 포동포동한 곱상한 아줌마가 주인이었는데
여기저기 두리번거리며
옷구경을 하는 내게
친절한 미소로
안에 들어와서 편하게
구경하라고 이끌었다.
따뜻한 옷을
찾는 중이라니까
요즘 유행하는 누비치마가
캐시밀론솜을 넣어
가볍고도
따뜻하다며
젊은 새댁에게
이게 잘 맞을 것 같다며 검정바탕에 화사한
핑크빛 모란꽃 무늬에
싱그러운 초록빛 아파리가
아로새겨진
치마를 보여 주며
애기를 잠시
내가 안고 있을 테니
한번 걸쳐 보라고 권한다.
내가 보기에도 탐스런
꽃무늬의 월남치마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남편이 쥐어준
5000 원으로
월남치마와 아줌마가
골라준 따뜻한
스웨터까지 사 들고
입이 함박만큼 벌어진 채
집으로 돌아왔다.
내 웃음 띤 얼굴을 보며
요한 씨가 말했다.
당신이 막내 놓고
조리도 제대로 못한 몸으로
우리 부모님까지
정성으로 모시니
그동안 없는 살림에
고생이 많았다며
이제부터 열심히 벌어
당신 호강시켜 즐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그래도 타관객지
서울이란 곳에 와서
밥 굶지 않는 것 만도
다행인데 부모님을
모시게 되니
조상들의 돌보심인지
먹고살 만큼
환자가 늘었으니
다행이라며
옷 꾸러미를 풀어 보곤
이쁜 걸로 잘 사 왔다며
새 옷이라고 아껴두지 말고 따뜻하게 입으라는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65 년 1월 결혼할 때
장만한 다후다 겹치마로
5 년을 버텨
걸을 때마다
서걱거리던 검정색
꼬리치마를 벗어던지고
누비치마를 입으니
추위란 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포근하고 따뜻했다.
그 꽃무늬 월남치마는
애지중지..
한여름을 빼고는 3 계절을
내리 애용해
카시미론 솜이 조금씩
오그라 들면서
종아리가 드러나도록
오래오래 입은 기억이 난다.





2024년 여름에도
그때 그 옷가게 아줌마..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금남시장 1번 길 입구
길모퉁이 파라솔 아래
신발이랑 옷가지를 펴놓고
팔고 있는..
지금도 그때 그 아줌마랑
인사를 하며 지낸다.
올해 귀국하면..
나와는 몇 살의 차이가 나는지
어림으로 짐작하던 아주머니
연세를 꼭 물어봐야지..
참 가난하던 70년대..
그 고생을 하면서도
내 집 마련을 위해
1원 한 장도 아껴 쓰던
질곡의 삶
내 젊은 청춘을 56년간 몸담아왔던 고향과 같은
금호동의 추억은
80 나이에도
어제 일처럼
새록새록 떠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