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호랑이 보다 더 무서운 시아버님.

primavera1945 2025. 2. 6. 08:29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3.

70년 삼복더위가 물러가고도 그해 여름은
왜 그리 더웠는지..

결혼하면서부터 남달랐던
효심을 가진 요한 씨의
오매불망은..
평생을 이고 지고 방물장사로 6남매를 길러온
시어머니를 향한 사모곡이
너무나 눈물겨워 승희네가
이사를 가고 옆방이 비게되자 대전에 계시던 시부모님께
하루빨리 합가 해서
평생토록 부모님께
효도하면서 잘 모시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혼전이던 막내 시동생도
상고를 나와 세무서에
취직이 되어 집을 떠났고
셋째와 넷째 시동생도
결혼시켜 두 부부만 살고 계신 터라 부랴부랴가재도구를
다 정리하시고
대전에서 택시를 대절해서
7월말 금호동에 도착하셨다..

그때 두 분의 연세가 62세..

택시까지 대절했지만
지극히 단출한 옷가방 2개와
내가 미쳐 상상하지도 못한..
절구공이도 없는 무거운
돌절구 1개와 합식기 10벌
그리고 같이 살게 되어
고맙다며 시어머니께서
현금 10000 원을
내 손에 쥐어주셨다.




시부모님을 대면한 것이
65 년 1월16일 결혼식날
이었고 두번째가
66년 12월 첫아들을 낳고
어머니 생신에 대전을
찾아뵈었을 때였다.
그리고 합가 하면서 3번째 상면이라 시부모님이
무척 조심스럽고
어렵기가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임신 8개월의
터질듯한 배를 끌어안고도 시부모님께 온갖 정성으로
수발을 들었고
부엌을 사이에 두었지만 시아버지의 기침소리까지
우리 방에서 다 들리고
두 살 네 살짜리가 찡찡대고  
울어도 작은방 방문은
세수하고 화장실 가고
식사하러 안방에 오실 때
외에는 열리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시아버지는 한 번도
지성으로 조근조근
말씀하시는
법이 없이 허구한 날
기차화통을 삶아 드신 것처럼
벼락치는듯한 호령에
호통이라 가뜩이나
나이 많은 호랑이같은
시남편에게 찍소리 한번
못하고 죽어지내고 있는데 ..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시아버지의 호통은 언제나 밥상머리에서 사단이 났다.

시부모님께 반찬 한 가지라도
더 신경을 써 없는 살림에
계란이라도 쪄 놓으면
어린 두 아들이 계란그릇을
서로 자기 앞으로 당긴다며
수저를 팽개 치고
소리를 벽력같이 질러대며 애새끼들을 이따위로 가르쳐 할애비 밥도 제대로
못 먹는다고 얻다 대고
버릇없이 할애비 반찬그릇 끌어당기느냐고 ..
저따위로 길러 뭐에
써먹을 거냐고..
호통을 쳐대시니  아이들은
놀라서 까무러치듯 울어대고
나는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며 아이 둘을
끌어당기고 그 와중에도
남편이랑 시어머니는
말 한마디 안 하고 혼나는
애들을 못본채 하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끼니때마다
애들 버릇 잘못 가리켰다며 회초리를 꺾어다 놓고
어려서부터 버릇을 고치려면  종아리를 때려가며 키우라고...
이제 고작 네 살 두 살짜리가
무얼 그리 잘못한다고..
지금 생각해도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어릴 때부터  
초등학교 졸업하고 온 동네 머슴꾼처럼 일하며
시아버지의 학대를 받아온
남편은 39의 나이에도
한 번도 시아버지의 처사가
부당하단 말 한마디 못하고
복종에 복종을 거듭하며
나를 보기 무안해했다.

성질 나쁜 우리 아버지한테는
잘못하더라도 평생 고생만 한
우리 어머니한테만은 잘해달라고..애원하기도 하고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에
비하면 시어머니는 참으로
착한 분이라
한 번도 화를 내시거나 나를  나무란 적은 없었다.

그 대신 방문을 닫아걸고
손주들과 마주치는 걸
피했고 합가 할 때부터 시아버지께서
아들집에 가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방안에만
있으랬다고 세상에
그 좁은 방이 답답하지도 않으셨는지
그야말로 앉은뱅이처럼
방문에 달린 손바닥만 한
유리를 통해 바깥 기색만
살피고 계셨다.

그리고 식사 때마다
수저를 팽개 치고 벽력 같은 고함에 아이들은 할아버지만 보이면 기절하듯
몸을 움츠리며 놀라는
모습을 보다 못해
애들이 아직 어리고 철이없어 음식상 앞에서 버릇없이
행동하니 차라리
두 분 밥상을 따로 차려 작은방에서 편하게 잡수시면 어떨까 여쭈었다가
우리가 합가한지 한달도
안되어 벌써부터 딴상 차려
니들끼리 맛있는 거
해 처먹으려고 다 늙은
우리 부부 따로 차려 준다고
예끼~ 어디서 배워먹은 행동이냐고 얼마나 야단을 치시던지 어느 하루는
아침 식사 때 시아버지
수저  팽개치는 통에
나는 그만
만삭의 상태에서 기절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뱃속의 애기 안 떨어진 게 다행이지 정말 사람이
죽을 노릇이었다.
이렇게 고함과 억압으로
통제하기 시작한 시아버지
때문에 안그래도 가난에찌든 서울생활은 마치 지옥의 불구덩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막달이 되어
배가 더욱 불러오자
시아버지께서
네 시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산바라지
못하니 그리 알고
친정어머니를 오시라고 하던지 알아서 하라시며
우리는 절대 산바라지
못 한다며 선을 그었다.

그리하여  아기가 언제
태어날지 몰라 8월 중순
대구의 친정 엄마가
올라오셔서 외손자 둘과
만삭의딸에
시부모님 식사수발까지
드느라 딸네집 생활이
고단하기 짝이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님은
방 안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고 9월 11일 딸을 낳게 되었을 때도 문밖을 내다보지 않고
방안에만 계셨고
마침내 남편이 아기를 받아주는데  
산통으로 비명 지르는 엄마가 죽는줄 알고 방문밖에서
문틈으로 들여다보며
목놓아 엉엉 우는
어린 두 손자를 본체만체
그렇게 방문 걸어 닫고 계시고 싶었을까?

딸의 산바라지에 두 사돈의  식사까지 차려드리면서  
엄마가 말씀하셨다.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냐고
어떻게 손녀가 태어났는데
안방이 백릿길 천릿길도 아니구먼 사부인께서는 어찌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느냐고
태어난 아기가 딸이라고 그러시는지 궁금하지도
않느냐고 서운해하셨다..

한술 더 뜬시아버지
음력 8월 열하루에 출산한 며느리에게 추석차례 어쩔 거냐고..
참 지금 생각해도 기가 찬다.
내가 아무리 나이가 어리기로
그렇게 마구잡이로 사람을
못살게 하고 싶으셨을까?

친정 엄마가 지금 금방 출산한 사람이 어찌 차례준비를 하겠느냐 9월 중기에 지내시면 어떻겠냐고 했더니 우리는 추석차례가 원칙이다 하셔서
아기 낳고 3흘만에 금남시장 오가며  제수를 사 나르고 선풍기도 없는 뜨거운 여름
친정 엄마와 같이
죽을힘을 다해
전을 부쳐  함석지붕 위에 올려 식히고 탕국이며 나물을 볶아 차례를 지내느라 갖 태어난
아기도 돌보지 못한채
죽을 곤역을 치루었기에
몸이 퉁퉁부어 오르고
눈이 제대로 떠 지지 않았다.

산후 사흘 만에 중노동으로
뼈와 살이 녹아나고 무너지는 육체의 고통보다
호랑이 같은 시아버지의
억지스러운 처사에
스물다섯살 새댁이었던 나는 서러움보다 비참한 내 신세에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다.




지금 생각해도 그 길고 긴
고통의 순간들을 어찌 버텼을까?
삼강오륜
일부종사를 가르쳐온
우리 친정아버지를 생각해서
며느리의 법도를 지켜 내고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임을
친정 아버지께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