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손자에게 나의 뿌리알려주기

1말들이 쌀통과 벽거울.

primavera1945 2025. 2. 5. 06:43

아직도 생생한 기억의 편린 22.

그 가난하게 살던 금호동..
70년 여름이었다.
아현동에 살고 있던 이종질녀
영숙이가 우리 집을 다니러 왔다.

서울로 이사 오기 전
한지의사 보수교육 중이던
남편을 만나러 왔을 때
첫돌짜리 둘째를 업고
아현동 영숙이네 집을 찾았을 때
시집살이하고 있던 영숙이가
반겨 맞아주며 점심때가 되자 카레를 만들어 준 생각이 난다.

난생처음 카레를 마주한 나는
역한 냄새에 비위가 상해
제대로 먹지도 못했지만
아담한 기와집에 살고 있는
나보다 1살 아래인 영숙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서울이란 대 도시에서
시집식구와 함께지만
기와집을 지키고 살고 있으니..
영숙이는 성공한 삶을
살고 있구나 싶어
한없는 부러움에 돌아서는
발길이 무거웠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70년
우리가 금호동 달동네로
이사 와서 단칸방에서
4 식구가 어렵게 살고 있을 때 영숙이가 우리 집을 찾아왔다.

옹색하기 짝이 없는 이모의
생활에 영숙이는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친정에  있을때
쌀은 대청마루 한쪽에 가구처럼 나무로 만든 쌀뒤주가 자리하고 있었고 놋쇠로 만든
붕어 자물쇠가 채워져 있어

몰락하기전 친정은 쌀뒤주 가득  가마니쌀을 준비해
놓고 산 기억이 있는데
부잣집 막내딸이던 이모가
단칸방에서  봉지쌀을 사 먹고 있는 모양이 한없이 불쌍하고 애처로웠는지
이모.. 쌀은 1말씩 사다 놓고
먹어요. 그러는 거다.
그 당시 쌀을 1말씩 살 여력도 없었고 쌀을 담아 놓을 쌀통도 없는 형편이었기에
한숨만 내리쉬는 내가
불쌍했던지
부부싸움 하고
바람 쏘인다고
집을 나서느라
빈손이다시피 한 영숙이가
금남시장 그릇가게에 가서
1말들이 쌀통을 사가지고 왔다..

이제 쌀통 사다 놓았으니
제발 봉지쌀 사 먹는 건
하지 말라고..
자칫 잘못해 봉지가 찢어지면 행길에 쌀 다 버리고 되니
쌀 1말씩 사면 그게
오히려 더 절약이 될 수 있다고
요한씨를 설득하는 거였다.

그리고 손바닥 만한
거울을 보고 혀를 차더니
신문지 크기의 벽걸이 거울도 하나를 사 놓고 갔다.

그 시절 샴푸라는 것도 없었고
빨랫비누로 머리를 감고
작은 손거울에 쭈그리고
앉아 빗던 머리..

상반신을 비추는 거울을
볼 때마다 이런 걸 성큼
선물할 수 있는
영숙이가 너무나 고마웠고
그런 여력을 가진 영숙이가
재벌 마나님처럼 우러러 보였었다.

조카 영숙이가 사 준 쌀통은
그 후 싶여 년이 되도록
애지중지 아꼈고
식구가  불어나서
두말짜리로 바꾸면서도
오랫동안 보관하며 어꼈던
그 쌀통에 대한 기억이
지금껏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
간간히 조카 영숙이와
카톡을 나누며
옛 생각을 돌이키며
추억에 잠길 수 있는 호사가 감사하고 또 감사롭다..









2025년 경추척수증 수술후 금호동을 방문한 조카 영숙이.